영화 '트로피'는 K팝 아이돌 콘서트에 가기 위해 아버지가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중고거래사이트에 내다파는 14살 재일조선인 3세 소희(항나, 사진)의 이야기를 좇는다. 사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14살 재일교포 소녀가 K팝 아이돌 콘서트에 가기 위해 아버지가 북한에서 받은 훈장을 중고거래사이트에 팔아버린다. 오는 10일 일본에서 개봉하는 영화 ‘트로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독립제작사 분부쿠(分福) 소속인
재일교포 3세 손명아(37) 감독이 조선학교에 다닌 자신의
성장기 경험을 각본에 새겨낸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는 사춘기 소녀다운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조선학교 무용반인 소희가 좋아하는 춤·노래에 들뜨고, 친구와 소소한 일상에 즐거워하는 나날이, “씨앗이여 어서 자라라/바람같이 대지에 뿌리 뻗어라”란 가사의 경연곡 ‘새싹’에 맞춘 공연 연습 과정과 어우러진다. 경연 대회 공연에서 주연을 맡은 소희는 방탄소년단(BTS) 팬이란 걸 계기로 일본 친구와 친해지면서 점점 북한 체제 이념을 강조하는 공연 주제가 껄끄러워진다.
자신의 성장기를 녹여낸 장편 데뷔작 '트로피'로 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된 재일교포 3세 손명아 감독을 3일 부천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엣나인필름
지난 3일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트로피’를 월드프리미어로 공개한 손 감독을 상영에 앞서 부천에서 만났다. “조총련계(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북한을 조국으로 지지하는 재일동포 단체) 공동체에 답답함을 느끼고 도망치듯 일본 대학에 진학했”던 손 감독은, 분부쿠 입사 1년 만인 8년 전, 어시스턴트(감독 조수)로 일하고 있던
영화 ‘멋진 세계’의 니시카와 미와 감독에게 “당신 안의 폭탄을 작품으로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듣고 ‘트로피’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절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 교복을 입고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던 보아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그는 의외로 “조선학교와 부모님에 대한 원한에서 시나리오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의 주인공 소희(항나)의 아버지 상주(이우라 아라타)처럼 조선학교 교사였다. “어머니가 학교 일이 너무 많아 가정상황이 안 좋았다. 늘 ‘우리학교(조선학교)가 중요하다. 우리학교가 힘든 시기’라며 늦게까지 일하셨다”고 돌아본 그는 “가정보다 소중한 우리학교가 대체 뭐냐,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Q : -BTS와 조선무용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조선학교 시절 무용부원은 머리도 좋고 미인이 많아서 동경했는데 어른이 되어 조선무용 작품을 검색해보니 ‘어린아이들이 세뇌당해서 너무 불쌍하다’는 코멘트가 있더라. 상반된 시각이 영화를 만드는 열쇠가 될 것 같았다. 또 일본에서 한류붐이 커지면서, 한국과 북한의 이미지가 굉장히 벌어지게 됐다. 왜 BTS는 멋지고 조선무용은 북한 미사일 뉴스의 자료화면으로 쓰이면서 위험하다는 인상을 줄까. 같은 민족의 춤인데도 정치적 견해나 대립에 의해 다른 이미지가 박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Q : -콘서트에 가려고 아버지 훈장을 파는 내용이 기발하다.
“일본은 중고거래가 활발한데 북한 물건도 정말 많이 판매된다. 분부쿠 기획개발 회의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아이디어였다.”
손 감독은
오사카 최대 코리아타운 츠루하시에서 자랐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에서 일본에 이민 간 주인공 선자(김민하)가 김치를 팔던 야시장이 츠루하시다. “동네에 재일교포가 너무 많아서 치마저고리가 너무 당연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영화 '트로피'에는 조선학교 무용교사 역의 배우 지순 등 실제 조선학교 출신의 재일교포 배우들이 출연해 조선학교의 진솔한 모습을 연기했다. 조선학교 교사인 어머니에 대한 원망에서 영화를 출발했다는 손명아 감독은,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틈틈이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말다툼하는 과정을 거듭했다"면서 완성된 영화를 본 어머니가 "생각보다 괜찮네"라고 하더라며 빙그레 웃었다. 사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우리나라(북한)는 좋은 나라’라고 배워온 그의 세계는 10대 시절 일본인 납북 문제 보도가 격화하면서 뒤집혔다. 손 감독은 “그때까지 우리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완전히 반대가 돼버려서 혼란스러웠다”면서 “일본대학에 들어가서도 북한 납치나 미사일 문제가 많아서,
일본 친구들한테 ‘쟤 빼고 화장실 가자’ ‘그러다 너 미사일 맞는다’등의 말을 들을 때면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떨 땐 분위기에 몰려 내가 먼저 농담처럼 그런 말을 던지기도 했는데 자학처럼 느껴졌다. 죄책감까지 들었다”고 했다.
Q : -그럼에도 영화 속 아버지는 ‘우리나라’를 옹호한다.
“조국만 믿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눈앞의 동료,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Q : -감독의 어머니도 그랬을까.
“어릴 땐 어머니가 조선학교밖에 활약할 장소가 없는 거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트로피’를 위해 조선학교 선생님들을 취재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쳐왔는지, 이해되는 느낌이 있었다.”
영화엔 조선학교가 2010년부터 시행된 일본 고교 무상화 정책에 배제되면서 학생 수가 급감하는 현실도 담았다. 손 감독은
“남북한 관계가 나빠지면서 지금은 조선학교에선 K팝이 대부분 금지”라면서 “그런데
집에 오면 얼마든지 K팝을 들을 수 있다. 지금의 재일교포 4세는 대개 일본에서 나서 자라 언어 문제가 없고 조선학교와 일본학교 교류도 활발하다. 예전처럼 ‘쟤는 재일교포니까 사귀지 말라’ 식의 차별은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일본인 친구 미라이가, K팝 가사를 이해하고 싶어서 소희에게 한국말을 배우는 장면도 이런 취재에서 나왔다.
영화 '트로피'에선 재일조선인 4세 배우 항나(앞줄 맨오른쪽)가 250대 1 경쟁을 뚫고 캐스팅돼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10대다운 모습부터 조선무용을 유려하게 추는 장면까지 소화해냈다. 사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재일교포 2세 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영화 ‘가족의 나라’(2012)에서 북송된 오빠 역을 했던 일본 배우 이우라 아라타가 ‘트로피’에서 딸 소희와 극을 이끄는 조선학교 교사 상주 역을 맡아 다시 조선말 연기를 펼쳤다.
일본 대중에게 알려진 배우 대부분이 조선학교를 지지하는 역할을 부담스러워해 난항을 겪던 중 고레에다 감독이 자신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2001)를 함께한 그를 추천했다. “이우라 아라타라면 좌우 관계없이 과감하게 연기할 것”이라면서다.
Q : -일본에서 조선학교 관련 영화는 여전히 제작이 어려운가.
“캐스팅부터 투자까지 매우 어렵다. ‘트로피’는 북한 훈장을 판다는 설정 때문에 조선학교들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북한 가곡 ‘너희들의 가방 안에’를 쓰고 싶었지만, 기존 곡들은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아, 영화 속 음악들은 중앙예술경연대회 출전 경험자, 금강산가극단 출신자들의 도움으로 오리지널 곡을 만들었다. 한 사람씩 인간관계를 구축해나가면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완성한 곡 ‘새싹’에 안무를 더한 극 중 소희의 피날레 무대는 5분에 달하는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 250대 1 경쟁을 뚫고 낙점된 재일교포 배우 항나가 공연 장면까지 빼어나게 소화했다. 손 감독은 “관객들이 조선무용의 아름다운 부분을 봐주길 바랐다”면서 “연습만 1년간 했고, 촬영 후 가편집 영상을 수십 번 돌려보며 매만졌다”고 말했다.
영화 '트로피' 일본 개봉판 포스터. 사진 K2픽쳐즈
‘트로피’의 일본어 제목은 한글 자모를 이용해 디자인했다. 일본말이 더 익숙하지만 자신만의 정체성을 간직한 조선학교 아이들을 상징하는 듯한 제목이다. 마치 일본어와도 한국말과도 다르지만, 이렇게 존재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관객에 은근히 말을 건네는 듯하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다.
손 감독은 “일본에서 북한과 조선학교 이미지가 나쁘지만, 영화에 정치적 메시지는 가급적 담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아버지와의 다툼, 친구와의 우정, K팝에 열광하는 모습은 한국·일본이 다를 바 없다.
한국과 일본의 관객들 모두 ‘트로피’를 가족 영화로서, 재일교포 아이들이 어떤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생생한 생활의 모습을 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TV제작사에서 경력을 출발했지만, 출연자의 불행을 재미로 소비하는 방송에 환멸을 느끼고 분부쿠에 합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앞으로도 사회 소외계층 문제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민, 종교적 문제 등의 주제를 대중화해서 많은 관객과 영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영화 '트로피'에는 최근 넷플릭스 영화 '굿 뉴스' 등으로 한국 관객에 인지도를 높인 배우 카사마츠 쇼 등 개성파 배우들이 출연했다 . 사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트로피’는 오는 5일에도 부천영화제 상영 및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된다. 손 감독과 함께 주연 배우 항나, 지순이 내한해 참석한다. 한국에선 오는 12월 정식 개봉할 예정이다. 부천영화제는 오는 12일까지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