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6년간 다닌 IT기업을 그만둔 이용우(33·경기도 화성)씨. 아이 맡길 곳은 없었고 대기업 팀장인 아내의 연봉이 두 배가량 많았다. “제가 버는 돈에서 보육과 가사 도우미 등의 비용을 빼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효율을 택했어요.”
김모(38·서울 관악구)씨 아내는 공인회계사다. 아내가 수습 시절 야근과 출장을 밥 먹듯 하는 걸 보고는 ‘같이 일하다가는 집안 망하겠다’ 싶었다. “결혼 조건 중 하나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공장 일을 관두고 ‘내조’를 자청했습니다.”
이씨와 김씨는 ‘현직 주부’다. 유튜브를 통해 바느질과 이유식 만들기를 배웠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어린이집 등하원 동선 꿀팁을 얻고, 할인 행사 중인 마트의 정보를 수소문한다. 이들은 “낮에 유모차 끌고, 장바구니 들면 아파트 경비원이 ‘회사 안 가시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며 “과거의 시선으론 특이한 선택이지만, 우리에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답했다.
이씨와 김씨 같은 ‘현직 주부’ 남성이 역대 최고치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육아·가사를 이유로 비경제활동인구로 집계된 남성은 27만4000명. 1년 새 16.6% 급증했다. 중앙SUNDAY가 남성 전업주부의 세계에 들어가 봤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지난달 30일 한낮에 만난 김씨의 손에는 대파가 고개를 내민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싸더라고요. 다른 곳에서는 한 단에 2600원인데, 요 너머 할인마트에서는 2200원이니까요.” 그는 커피 전문점 바닥에 장바구니를 내려놓더니, “오늘 아내가 4박 5일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라, 대파 숭숭 썰어서 육개장이라도 할까 해요”라는 말부터 했다.
“솔직히 처음엔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이 컸어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남자가 집에 있다는 걸 어떻게 보는지 알잖아요. 근데 아이가 안정적이고, 저도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시쳇말로 집안이 잘 굴러간다고 할까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 느껴요.” 김씨의 아내 김모(34)씨의 말이다.
1분기 여성 전업주부 전년비 1.9% 감소 올해 1분기 여성 전업주부는 전년 대비 1.9% 감소한 653만6000명으로, 같은 분기 기준 역대 최소치다. 남성 전업주부가 늘고 여성 전업주부가 줄어드는 건 ‘하우스 허즈번드’(house husband) 현상. 1990년대 초 미국에서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남성 전업주부가 실직이나 사업 실패가 주원인이었다면, 지금은 결이 달라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지난 4월 한국은행 고용연구팀에 따르면, 지난해 4년제 대학 이상 학력을 가진 25~34세 경제활동인구 중 여성이 남성의 95.5%에 달했다. 2000년 51.5%에서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인데, 청년층에서 남녀 경제활동 참가 격차가 거의 사라졌다는 뜻이다. 지난해 남성 대비 여성 전문직 취업자 비율은 101.4%로 거의 같았다.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 소장은 “핵가족화와 성 평등주의에 높은 연봉의 전문직과 대기업 임직원 여성이 증가하는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려 가정의 ‘시간’과 ‘자원’을 재배분하는 전략이 늘고 있다”며 “육아와 가사의 시간, 벌이를 통한 자원 축적을 어느 한쪽에 몰면서 가정 운영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아내가 절 보고 후방 사령관이라더군요.”
최원형(35·경기도 성남)씨가 웃으며 말했다. 최씨는 이씨·김씨와는 다른 경로로 같은 결론에 이른 경우다. 대기업을 다니다 육아휴직을 신청했는데, 6개월이 지날 즈음. “제가 ‘주부 역할’에 더 맞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보급병 출신인데, 집에서도 후방 병참기지를 지휘하는 게 제 스타일이었던 거예요. 아내가 병원에 다니는 직종이라 시간이 들쭉날쭉한 것도 있고요.” 결국 최씨는 육아휴직을 연장한 뒤 아예 직장을 정리했다. “처음엔 남자가 집에 있다는 게 좀 어색했는데 지금은 그냥 내 일이에요. 회사 다닐 때보다 체계적으로 생활하는 것 같아요.” 최씨의 아내 박모(32)씨는 남편을 따라 웃었다. “외벌이를 하게 됐지만, 제가 전방에서 일하는 만큼 후방의 애 아빠가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어요. 안심이 됩니다.”
최씨는 요즘 가사 서비스 플랫폼 ‘숨고’ 앱을 통해 일대일 요리 레슨을 받고 있다. “유튜브로 배우다가 한계가 있어서 찾아봤다”며 “알고 보니까 저 같은 남성 주부들이 꽤 많았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현장도 달라지고 있다. 시사쿡 요리 아카데미 박광현 팀장은 “최근 3~4년 전만 해도 남녀 비율 1대 9였는데, 현재는 3대 7”이라며 “남성 중 중년 이상은 자격증이나 창업 같은 실질적인 목적으로, 청년층은 취미와 실용을 위해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아내를 위해 육개장을 만들겠다는 김씨도 요리 학원에 다니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 백화점 문화센터 관계자도 “영유아 강좌의 경우 보호자가 함께 입장해야 하는데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오는 경우가 30% 정도”라며 “그런 분들이 (여성) 주부 틈에서 종종 요리나 인문학 강좌도 듣는다”고 전했다. 가사와 육아의 틈새 시간을 활용한다는 뜻이다. 가전·유통업계도 이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한 가전업체 관계자는 “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디자인과 색상 위주로 광고했다면 최근엔 남성이 주로 따지는 성능 수치와 비교 데이터를 전면에 내세운 콘텐트의 반응이 더 좋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 주부의 증가는 육아와 가사에 남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남성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출산율도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만큼, 저출산·고령화라는 사회적 도전 앞에서 긍정적인 모멘텀”이라고 평가했다. 남성 전업주부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거두기만 해도 고질적인 저출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제언도 있다.
고질적 저출산 문제 해결 방안으로 그러나 그늘도 있다. 일부 보험사에서 남성 전업주부를 직업 분류상 ‘주부’가 아닌 ‘무직’으로 처리해 보험료가 더 높게 책정되거나 실손보험 가입이 제한되기도 한다. 남성 전업주부 중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 핵심노동연령(25~54세)에 해당하는 인원이 3분의 1 정도다. 퇴직 연령층이 남성 전업주부의 다수라는 얘기다. 이정민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 연구위원은 “보험사의 직업 분류 체계가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전제로 설계된 탓에 남성이 가사를 전담하는 현실을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남성 전업주부가 27만 명을 넘어선 지금, 보험·신용평가 체계에서 가사 노동자를 성별 구분 없이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진단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27만 명이라는 통계 안에는 완전한 전업주부뿐 아니라 육아휴직 중인 남성도 섞여 있고, 여전히 퇴직 연령대가 많고, 여기에 청년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등, 세부 분류에 따르는 맞춤형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육아와 가사는 여전히 여성의 몫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뿌리 깊지만, 남성 전업주부 27만 명이라는 숫자는 그 관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용우씨는 오늘도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오이를 썰고 참나물을 다듬어 저녁을 준비한다. “나의 일이 됐어요. 남자가 집에 있다는 시선보다 가정이 잘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합니다. 회사에서는 제가 ‘이 대리’였지만, 이젠 가계 전체를 운영하는 ‘COO(최고운영책임자) 이용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