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162.66엔. 언뜻 40년 전의 숫자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지난달 30일 뉴욕 시장에서 기록한 달러-엔 환율이다. 1986년 이후 가장 높다. ‘수퍼 엔저(円低)’다. 엔화의 시곗바늘이 40년 전으로 되돌아가며 안전자산으로서 엔화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40년 전 엔화의 운명을 바꾼 건 1985년 9월 22일의 ‘플라자 합의’다.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달러 가치를 낮추고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등 주요국 통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플라자 합의 이전에 1달러=250엔 수준이던 엔화 가치는 1년 만인 1986년 9월에 달러당 150엔까지 상승했고, 1987년 연말에는 120엔대까지 뛰어올랐다. 엔고(円高)의 시작이다.
엔화 가치 40년만에 가장 낮아
투자 둔화에 노동생산성 하락
과도한 나라빚도 엔저 야기해
당국 개입도 약세 막기엔 부족
정근영 디자이너
엔고로 수출 기업의 타격이 커지자 일본 정부는 기준금리를 내리는 등 금융완화 정책을 펼쳤다. 늘어난 유동성은 부동산과 증시로 몰리며 거품을 키웠다.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0년대 초 거품은 꺼졌고 일본 경제는 저금리·저물가·저성장에 시달리며 ‘잃어버린 30년’에 빠졌다. 그럼에도 안전자산으로서 엔화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엔화 실질 가치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 하지만 안전자산 엔화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엔화의 몸값은 하락 중이다. 2022년부터 4년간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30% 넘게 떨어졌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엔화의 실질 구매력을 보여주는 실질 실효환율(NEER, 2020년=100)은 1995년 4월 194.0에서 지난 2월 66.3까지 급락했다. 31년 만에 엔화의 실질 가치가 3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엔화를 보유할 매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일본 경제 구조도 엔화 약세를 심화하고 있다. 상품 수출에서 해외 투자로 돈을 버는 국가로 바뀐 탓이다. 지난해 일본의 경상수지는 2165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무역수지(-262억 달러) 적자에도 소득수지(2802억 달러) 흑자로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하지만 해외 재투자가 늘면서 소득수지 흑자 일부가 일본 국내로 환류하지 않으며 엔화 수요가 줄어들었다. 여기에 에너지의 95% 이상을 중동에서 수입하는 구조로 인해 이란 전쟁 이후 국제 유가 급등으로 달러 수요가 늘어나며 엔화 값을 끌어내리고 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성태 삼성증권 연구원은 “일본의 투자 증가율이 낮고 제조업의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개선될 가능성도 적은 데다 고령화 진전에 따른 가계 저축률 급락, 일본 금융시장 내 외국인 투자 비중 확대 등으로 엔화의 장기적 약세와 안전자산의 특징이 약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증시의 외국인 보유 비중은 2010년 26.0%에서 지난해 32.4%로 증가했다. 차익 실현에 나선 외국인의 달러 수요까지 가세하며 엔저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또 다른 요인은 과도한 나랏빚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트레이딩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51%에 달한다. 올해 일본 정부 예산(122조 엔) 중 25%가량(31조 엔)을 국채 원리금 상환과 이자 지급에 써야 한다. 블룸버그는 “과도한 국가 채무가 엔화에 대한 신뢰를 잠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도한 국가 채무가 엔화 신뢰 잠식”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공격적인 확장 재정정책도 엔화 가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다카이치 정부는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등 전략 분야에 2040년 회계연도까지 370조 엔(약 2조 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국채 금리가 오르며 정부의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 지출 계획이 일본 정부의 재정건전성 우려를 증폭하며 엔화 약세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퍼 엔저 흐름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달 16일 일본은행(BOJ)이 기준금리를 1%로 올리며 1995년 이후 3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 됐지만 엔화 가치는 오히려 더 떨어졌다. 여전히 주요국 기준금리와 격차가 큰 탓이다. 게다가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꿈틀대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를 다시 자극하고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다카이치 총리가 통화 완화 정책을 선호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BOJ의 추가 금리 인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도 시장의 수퍼 엔저 현상을 거들고 있다”고 밝혔다.
시장의 우려는 엔저의 고착화다. 중장기적으로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80엔, 최악의 경우 200엔대까지 밀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헤지펀드의 엔화 순매도(숏) 포지션은 2017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났다. 외환 옵션 시장에서는 앞으로 1년 내에 엔화 가치가 ‘1달러=180엔’에 이를 확률을 15% 수준으로 반영하고 있다.
일본 당국, 엔저 막으려 724억 달러 써 최악의 시나리오는 ‘1달러=200엔’이다. 다만 1달러=200엔의 시나리오에는 온갖 악재가 함께 출현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다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시장의 예상보다 더 매파(통화 긴축)적으로 돌아서고 미국 국채금리가 크게 뛰면서 동시에 국제 유가가 급등하는 한편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돼야 한다는 것이다. 누빈의 매크로 크레디트 부문 대표인 로라 쿠퍼는 “BOJ가 정책 정상화를 늦추거나 추가 엔화 약세를 사실상 용인하는 상황까지 겹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당국이 쥔 카드가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불안 요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올해 4월 28일부터 5월 27일까지 11조7300억 엔(724억 달러)을 쏟아부었지만 엔화 가치의 급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루야마 린토 SMBC닛코증권 외환·금리 전략가는 “진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단순한 엔화 가치 하락이 아닌 통제 불가능한 급락”이라며 “외환시장 개입마저 효과를 잃는다면 시장은 일본 당국의 개입 자체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것이고 엔화 약세는 더 증폭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