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부가 최첨단 AI 산업을 앞장서서 육성해야 한다는 ‘큰 정부론’이 여권에서 부상하고 있다. AI 대전환 시대를 맞아 정부가 첨단 산업을 최전선에서 이끌며 국가 대도약을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5일 페이스북에 올린 ‘AI 생산혁명론’을 통해 “AI는 단순한 기술혁명이 아니라, 생산비용·생산시간·생산규모를 동시에 바꾸는 생산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18세기 영국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증기기관을 먼저 발명해서가 아니라 가장 거대한 생산체계로 조직했기 때문이고, 19세기 미국 역시 전기를 대량 생산과 전국 단위 산업망 위에 결합해 새로운 경제를 만들었다”며 “기술은 생산을 바꾸고, 생산은 국가를 바꾼다. 우리는 또 하나의 전환점 앞에 서 있다”고 했다.
김 실장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더 뛰어난 AI를 누가 설계하는가가 아니다”라며 “누가 AI를 가장 많이, 가장 안정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생산할 수 있는가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더 이상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다. 전력망을 구축하고, 산업부지를 조성하며, 공급망을 조직하는 생산 플랫폼”이라고 했다. 기업이 아닌 국가를 AI 산업 경쟁의 주체로 정의하며, 시장 뒤에 물러서지 않고 전면에 나서는 ‘큰 정부론’을 꺼낸 것이다.
김 실장은 또 “AI 시대의 경쟁력은 개별 기업의 경쟁력이 아니라, 국가 전체 생산체계의 경쟁력”이라며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제조 역량과 전력 인프라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될 때 국가는 비로소 생산 플랫폼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력·용수 등 생산 인프라 구축 ▶교육·창업 등 생산능력 재생산 ▶생산의 과실을 생산으로 연결하는 생산·분배의 선순환 등 3가지를 정부의 역할로 제시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정부는 추가 세수를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래 대응 기금 신설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뉴스1
김 실장의 주장은 이날 오후 열린 고위 당정협의회를 통해 정책으로도 구현됐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모두발언에서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 세수를 바탕으로 ‘미래 대응 기금’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기금의 용도로는 “3대 메가프로젝트 지원을 포함한 미래 성장 능력 창출, K자형 양극화 대응, 2030 청년을 위한 주거·창업·일자리 지원 등 대한민국의 미래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자 한다”고 했다. 기금이 신설될 경우 해당 사업에 대한 재정 투입 여력이 늘어나 정부 역할이 확대된다. 이 역시 AI 경쟁의 주체를 국가로 규정한 김 실장의 인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당초 이재명 정부는 국가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은 강조하면서도, 산업 분야에선 기업이 앞장서고 정부가 한발 물러서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취임사에서 “기업인들이 자유롭게 창업하고 성장하며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든든하게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노동자 등 약자 권리 보장이나 불공정 관행 근절에 정부 역량을 집중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를 접견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SNS]
하지만 지난해 후반기부터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특히 지난해 10월 이 대통령과 만난 샘 알트만 오픈AI 대표가 했던 “전 세계가 한국 없이는 AI를 발전시킬 수가 없다. 특이점은 메모리칩에 달려 있다(Singularity is memory)”는 말이 청와대 안팎에서 널리 회자됐다고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AI 발전의 병목 지점이 결국 한국 기업이 생산하는 메모리였고,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그렇다면 국가가 반도체 생산 확대에 필요한 용수·전기·입지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800조원 규모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도 이런 기조에서 도출됐다는 것이다.
‘큰 정부론’이 재조명받는 데엔 기술 패권 경쟁의 영향도 있다. 일각에선 최근 미국의 ‘칩스(Chips)법’, 중국의 ‘AI 플러스(+)’ 전략, 일본의 공동출자 회사 라피더스(Rapidus) 육성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국가 주도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경제학)은 “지금은 산업 구조 자체가 완전히 바뀌려는 상황으로 정부의 산업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5일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과거 고속도로, 초고속통신망이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이끈 것처럼, 3대 메가 프로젝트를 속도감 있게 실행하면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 상황을 1970년대 국가 주도 개발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기업의 영향력이 막강해진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서 산업을 재편하는 게 시대착오적이란 반론이다. ‘3대 메가프로젝트’의 투자 재원 4755조원 역시 삼성전자·SK그룹이 부담하는 만큼, 정부는 주도권보다 간접 지원에 주력해야 한다는 쓴소리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기업들의 입장에선 어려움이 생기면 결국 투자를 못 하게 되는 것”이라며 “정부가 단순히 부지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규제를 해소하고 제도를 바꿔 기업의 부담을 줄여야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성진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광주 군 공항을 1년 안에 이전할 수 있느냐 같은 문제에도 답하지 못하면 약속이 이행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