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도심에서 일면식도 없는 10대 여고생을 살해한 장윤기 씨가 지난달 14일 오전 광주 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뉴스1
국회가 살인범 장윤기(23)의 아버지 사례와 같은 ‘친족 간 증거인멸’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발의됐는데도 2년 가까이 논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법안의 필요성을 두고는 찬반 논란이 있지만, 극한 정쟁에 건설적 대안을 논의조차 하지 않은 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장윤기의 아버지이자 현직 경찰인 장모 경감은 아들의 범죄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인멸했다. 장윤기는 지난 5월 5일 광주 광산구 길거리에서 이채원(17)양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장 경감은 그로부터 사흘 뒤 장윤기 자취방에서 가슴과 목 부위가 훼손된 성인용품 리얼돌을 폐기했다. 장윤기의 중·고등학교 시절 휴대폰도 소각했다. 검찰은 훼손된 리얼돌을 성범죄 고의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판단했지만 재판부에는 리얼돌 영상자료만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 경감은 처벌받지 않는다. ‘범인의 친족은 증거인멸, 범인도피죄 등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의 형법상 특례조항(형법 155조 4항) 때문이다. 이 조항의 존재 가치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갈린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버지가 아들의 범죄 증거를 숨겨주는 게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며 “특례를 없애도 실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큰 반면 잠재적 범죄자만 양산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 한상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족 간 윤리와 정의에 대한 관념이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중범죄는 친족 간 증거인멸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김경진 기자
학계 논쟁에 기반한 법안은 2년 전 발의됐지만 논의되지 않았다. 주철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4년 9월 “형사법이 다종·다양한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며 범인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증거인멸죄 또는 범인도피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을 냈다. 헌법재판소가 그해 6월 피해자의 재판절차진술권을 근거로 친족간 재산범죄 처벌 면제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자 증거인멸까지 손 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법안은 정쟁에 파묻혔다. 여야는 2024년 하반기엔 이재명 대통령 재판과 국무위원 탄핵으로 거세게 맞붙었다. 그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로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당선된 이후 민주당은 ‘내란 청산’과 ‘사법 3법’(법왜곡죄·재판소원·대법관증원) 처리에 골몰했다. 국민의힘도 장외투쟁과 필리버스터 등 내내 강공으로 맞섰다.
그러다 국회는 헌재가 못 박은 친족 재산범죄 처벌법 개정 시한(2025년 12월 31일)이 끝나가자 부랴부랴 논의에 착수했다. 지난해 12월 5일에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에 관련 법안을 상정했다. 하지만 주 의원의 형법 개정안은 아직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법사위 관계자는 “정쟁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빠듯해서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는 게 우선이었다”며 “증거인멸 문제까지 논의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국회는 이번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다. 한정애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지난 2일 주 의원과 같은 취지의 법안을 발의하는 등 대안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대표적인 정쟁의 장인 법사위에서 건설적 논의가 진행될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