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1875년 일본군함 운요호의 강화 해협 불법 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개항했어요. 그전까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취했던 조선은 이후 1882년 미국, 1883년 영국 독일, 1886년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며 국제 외교 무대에 등장했죠.
대한제국의 외교관과 궁내부 산하 관리가 입던 서양식 대례복을 살펴본 원지우(왼쪽)·박세아 학생기자.
개항은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 관계를 갖는 일을 뜻해요. 개항 이후 조선에는 서양의 여러 문물이 전해졌어요. 고종이 살던 경복궁의 건청궁 앞뜰에 전깃불이 켜졌고, 궁궐 안에는 전화기가 설치됐죠. 또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교육기관을 통해 근대 교육이 시작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개항 이후 조선이 서구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고 여기곤 하죠. 하지만 새로운 서구 문물이 연신 쏟아지고,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운 가운데에도 조선과 대한제국은 경쟁력을 갖추고,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와 같은 흐름은 공예(工藝)에서도 나타납니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서울공예박물관에서는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에 공예를 통해 국제 사회와 소통하고 위용을 갖추고자 했던 우리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전시 '더 하이브리드'가 진행 중이에요. 고종의 외교 선물과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 참가 등을 계기로 국내외에 흩어졌던 대한제국 공예 유물을 한자리에 모았죠. 개항기 전후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전환기 공예’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어요. 박세아·원지우 학생기자가 이효선 학예연구사와 함께 동서양 미감이 교차하고 문화가 융합하는 과정을 알아보기로 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공예박물관의 전시 '더 하이브리드'를 찾아 개항 이후 전환기 공예에 대해 살폈다.
세아 학생기자가 "전시 제목인 '더 하이브리드'는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요"라고 질문했어요. '하이드리드(hybrid)'는 서로 다른 두 개가 혼합됐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데요. 이 표현은 미국의 수학자 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의 기행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등장합니다. 그는 1884년 고종의 초청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 말총으로 만든 서양식 모자를 선물 받았어요.
"당시 로웰이 고종으로부터 선물 받은 모자는 갓의 주재료인 말총으로 만든 머리 부분이 둥글고 챙이 짧은 보울러 모자(Bowler hat) 형태였어요. 조선의 재료로 만든 서양식 모자에 감명받은 로웰은 '새로운 모자가 등장했으니 곧 동서양의 결합으로 탄생한 하이브리드였다. 그 형태는 외국에서, 재료는 이 땅에서 비롯되었다'라는 말을 남겼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변화하던 당시 우리나라 공예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사각형으로 얇게 가공한 소뿔에 그림을 그려 장식한 이층 가구인 화각농.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오늘날에도 외교 현장에서 전통 공예품 선물은 국가 간 신뢰를 구축하고 우호의 의사를 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죠. 조선 왕실도 예로부터 외국 사절과 인사들에게 아름다운 공예품을 선사하여 친교와 유대를 다지곤 했어요. 고종이 초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에게 선물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백자 청화 용무늬 항아리가 좋은 예시인데요. "다섯 개의 발가락을 갖춘 용이 그려진 이 항아리는 왕실의 혼례와 진연(進宴) 같은 의례에서 술을 담거나 꽃을 꽂는 용도로 사용했어요. 현재는 프랑스 국립세브르도자박물관이 소장 중이죠."
플랑시 공사는 140년이 넘는 한국과 프랑스 교류사의 포문을 연 인물이기도 합니다. 초대 프랑스 공사로 1888년 조선에 부임해 1891년까지 근무한 그는 1896년에 다시 내한해 1906년까지 공사직을 역임했는데요. 긴 근무 기간 동안 양국 간 외교관계 기틀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이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에 공식 참가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줬죠.
고종이 조선에 부임한 초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에게 선물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백자 청화 용무늬 항아리를 살펴본 박세아 학생기자.
전시실에는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 한국관에 출품된 백자 청화 모란무늬 화분대가 있었어요. 이 화분대는 도자 부문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수공예품 중심으로 구성된 파리세계박람회의 대한제국관은 과학기술과 산업화의 성과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던 당시 박람회의 주요 흐름과는 결이 달랐어요. 그래서 당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중국·일본의 아류로 인식되던 한국 공예를 독자적 문화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죠.
이처럼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뒤 근대 국가로 거듭나는 것은 물론, 세계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노력했어요.
하지만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자주권을 상실합니다. 미국인 교육자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고자 노력했는데요. 고종이 헐버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하는 나전 칠 길상무늬 삼층장도 전시됐죠. 물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 구름 사이를 나는 용 등 장수·복·다산을 상징하는 요소, 즉 길상무늬로 표면을 장식한 가구입니다.
민영환이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여해 받은 기념장. 이후 대한제국은 훈장 제도를 도입했다.
대한제국은 1899년 훈장 업무를 전담하는 표훈원을 설립했다. 사진은 훈장 중 하나인 대훈위 서성대수정장.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형태로 오려 기물의 표면에 붙이는 장식기법을 나전이라 해요. 이 삼층장은 특히 크기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높이가 175cm에 달하는데요. 우리 전통 가옥보다는 서양 건축에 어울리는 규모죠. 이 삼층장이 서양인의 생활 양식에 맞게 제작됐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의 시선과 생활 양식을 고려해 제작한 공예품은 조선의 외교적 소통과 관계 형성에 공예품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지우 학생기자가 "우리나라의 공예품은 선물용으로만 활용된 것이 아니라, 유럽 특히 프랑스의 공예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어요"라고 말했죠. 이 학예연구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을 접시 모양 입술과 긴 목, 부푼 어깨를 가진 고려청자 병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얀 태토(胎土) 위로 은은한 녹색 유약이 감도는 형태였죠. 앞서 언급한 플랑시 공사는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13년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동시대 백자뿐만 아니라 고려청자, 삼국시대 토기까지 약 2500점에 달하는 방대한 문화유산을 수집했어요. 플랑시는 자신의 수집품을 프랑스 주요 국립기관에 기증했는데, 세브르도자박물관에 기증한 260여 점의 도자기는 프랑스의 국립 도자 제작기관인 세브르 제작소의 도공들이 새로운 영감을 얻는 계기가 됐죠.
원지우 학생기자가 콜랭 드 플랑시 프랑스 공사가 수집한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일부인 고려청자 병을 살폈다.
플랑시가 수집한 고려청자 병 옆에는 부산·울산·서울 등 우리나라 도시 이름을 붙인 화병들이 있었어요. "세브르 제작소가 프랑스로 유입된 고려청자 등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하고, 서울·울산 등 한국 도시 이름을 붙인 화병 시리즈예요. 우리나라 도자에서 영감을 받아 재해석한 ‘하이브리드 도자’로, 우리 도자의 외형에 서양의 근대 화학 기술이 결합한 유약을 입혔죠. 이는 동서양 미감이 교차하고 문화가 융합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공예는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과 함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받아들이며 발전했어요.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장식미술 및 근대공업박람회에 출품된 청자 나전칠 넝쿨무늬 화병은 김봉룡 작가의 작품으로, 청자에 나전 장식을 붙여 유려한 식물 곡선을 표현한 형태인데요. 이 화병은 자연물의 유기적 곡선과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 유럽의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과 유사한 조형미를 인정받아 은상을 받았어요. 전통 공예 중 하나로 인식되던 나전칠공예가 서양 조형미와 만나 근대화되는 과정이 담긴 작품이죠. 그의 수상은 당시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국내 공예계에 큰 자극을 줬어요.
프랑스 세브르 제작소는 우리나라의 도자를 연구해 새로운 양식의 도자기를 생산했다. 사진은 서울 화병.
서구 여러 나라와 우리나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공예품부터 프랑스에 영향을 준 한국의 도자까지. 개항 이후 우리나라 전환기 공예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등장한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 공예의 지평을 넓히는 원동력이 됐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정세가 어지러웠던 시기에 세계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아남고자 했던 우리나라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동행취재=
박세아(서울 목동초 5)·
원지우(경기도 현민초 4) 학생기자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예전부터 박물관에 자주 다녔었지만 서울공예박물관은 첫 방문이었는데요. '더 하이브리드'를 취재하며 개항 이후 우리나라 공예품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고 제가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취재에서 본 전시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유물 하나는 서울 화병입니다. 이 화병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름이 우리나라의 지역 이름이어서 신기했어요. 작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져 인상 깊기도 했습니다. 서울 화병 외에도 울산 화병, 부산 화병이 있는데 모두 우리나라 지역 이름이죠. 그리고 백자 청화 용무늬 항아리는 현존하는 항아리 중에서 가장 큰 편이라 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이 항아리는 술이나 꽃을 담는 데 사용했다고 해요. 이번 취재를 통해서 역사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여러 가지 유물들도 많이 알게 되어서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박세아(서울 목동초 5) 학생기자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리는 '더 하이브리드' 전시회에 취재를 가기 전 저는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의 공예품에 대해 잘 몰랐어요. 직접 가서 보니 당시 공예품들이 아주 특별해 보였어요. 이효선 학예사가 전환기 공예에 대한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주셨는데 그동안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들을 많이 본 저로서 굉장히 새롭게 생각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특히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유물은 백자 청화 용무늬 항아리예요. 다른 도자기에서 봤던 용 그림들과 다르게 느껴졌고, 제가 본 용 그림 중 가장 멋있었어요. 서구와 교류하던 대한제국 시기의 공예품들은 조선시대와의 확실히 다른, 대한제국만의 독창적인 모습이 느껴졌어요. 역사를 좋아하는 학생으로서 대한제국을 새롭게 느끼고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애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