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문학, 봉사, 운동, 신앙생활이라는 공통분모로 연결되어 있다.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오다 보니 대화의 주제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문학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글이 왜 써지지 않는지에 대한 하소연을 듣게 된다. 봉사 모임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날씨가 더워서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운동모임은 그나마 활기가 있다. 함께 땀을 흘리고 성취감을 나누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는 익숙한 대화와 관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의 생각에 맞추고 분위기에 맞추다 보면 정작 내 삶은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시간을 투자하기로. 그 다짐을 하고 나니 오히려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나는 공책을 펼친다.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내려가면 생각이 정리되고 방향이 보인다. 며칠 전 수납 상자에 쌓여 있던 노트들을 정리하다가 새 공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단체방에 공책 할인 행사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막냇동생은 내 예상보다 훨씬 크게 반응했다. 50권이 들어 있는 공책 상자 두 개를 직접 집까지 배달해 준 것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감동한 나는 BTS 사진이 붙은 후디를 선물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새 공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문학 강좌를 알게 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했는데, 그날 나는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다. 참가자는 열 명 남짓이었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강사의 이야기는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히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강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수필과 소설, 디카시를 합평하면서 정해진 관점으로만 작품을 보고 있었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좁은 길만 바라보며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은 다양한 각도에서 읽힐 때 더 풍성해지고,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한 시인 강사는 “시는 철학의 완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60여 편의 시에 곡을 붙여 자살 예방 운동에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한 중견 시인이 보내 준 시에 답례로 내가 트로트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어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했던 일이었다.
그날 강의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시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시를 시와 노래로만 소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문학의 역할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 안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넓고 배움은 끝이 없다. 익숙한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경험은 또 다른 창을 열어 준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작은 틀 안의 생각일 수도 있다.
강의 마지막에 시인 강사는 물었다. “당신의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지금의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