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드라마 ‘아버지의 집밥’이 올해 부천영화제(BIFAN) 기획전을 통해 상영됐다. [사진 BIFAN]
2024년부터 국내 모바일 콘텐트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숏드라마가 극장까지 진출했다.
지난 4일,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공개된 이준익(67) 감독의 첫 숏폼 드라마 ‘아버지의 집밥’ 상영관.
아픈 아내를 위해 몇 시간씩 걸려 밥상을 차려낸 하응(정진영)은 아내 순애(이정은)가 찌개 냄비를 뒤엎자 벌컥 화를 내지만 이내 할 말이 없어진다. 결혼생활 40년간 순애가 메주까지 손수 담가 정성껏 끓여준 된장찌개 밥상을 그가 뒤집어엎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다.
“이거 된장찌개 아니에요. 된장 맛 음식물 쓰레기지.”
순애의 밥투정에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모바일 기기에 최적화한 9:16 화면비의 세로로 긴 영상이 인물들의 표정 변화, 몸짓 하나까지 놓칠 새라 클로즈업해 담아냈다. 부천 CGV소풍 영화관의 190석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왕의 남자’(2005)의 천만 흥행사 이준익이 동명 웹툰(작가 고리타)을 토대로 펼쳐낸 노부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숏드라마 에피소드 61개를 이어 붙인 ‘아버지의 집밥’은 총 상영시간이 156분에 달했다. 관객들은 “세로 화면이 낯설었지만 갈수록 몰입됐다” “모바일로 봤다면 혼자 봤을텐데 다 같이 봐서 좋았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이 감독은 “세로 화면이 배우를 엿보는 느낌이 있더라. 심리와 감정에 대한 몰입도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면서 “올 추석께 극장 개봉을 추진해보자고 레진(투자·유통사) 측을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돌 주연 숏드라마의 극장판 ‘방과후 퇴마클럽: 소녀들의 밤’이 올해 부천영화제(BIFAN) 기획전을 통해 상영됐다. [사진 BIFAN]
지난 2일 개막한 부천영화제는 장르 영화의 새로운 풍경을 소개하는 ‘판타스케이프’ 부문에 ‘플랫폼 기획전: 숏폼 시네마’를 편성했다. K팝 아이돌 기반 숏드라마 플랫폼 ‘킷츠’,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봄툰을 운영해온 키다리스튜디오의 ‘레진스낵’ 등이 제작한 신작 4편을 상영했다. 레진스낵이 ‘아버지의 집밥’과 ‘사랑하는 죽음’(감독 이원석)을 50여 부작 세로형 드라마 전편을 이어붙인 형태로 상영했다면, 킷츠는 올초 세로형 숏드라마로 공개한 피프티 피프티 주연 ‘방과후 퇴마클럽’(감독 정주)과 NCT 제노·재민 주연의 스포츠 성장물 ‘와인드업’(감독 김성호)을 가로형 극장판으로 선보였다. 원소스멀티유스(OSMU)를 염두에 두고 가로형 포맷을 기획 단계부터 준비해온 덕이다. 부천영화제 김형석 한국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는 “올해는 많은 영화 감독들이 숏폼 형식 실험에 나선 기념비적인 해”라며 기획전의 취지를 밝혔다.
아이돌 주연 숏드라마의 극장판 ‘와인드업: 더 무비’가 올해 부천영화제(BIFAN) 기획전을 통해 상영됐다. [사진 BIFAN]
세로형 화면이 많아 ‘버티컬 드라마(Vertical Drama)’로도 불리는 숏드라마는 대부분 50~80부작으로 구성돼있으며, 회당 2분30초를 넘지 않는다. 평균 1억6000만원대 예산으로 1~2주 안에 촬영을 마치는 초경량 제작 방식이 특징이다. 중국·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수조원대 규모로 시장을 키운 기존 숏드라마 콘텐트가 치정·복수·BL(남성동성애) 등 선정적 소재가 많았다면, 최근엔 장르와 타깃이 다양화하는 추세다. 후발주자로 뛰어든 한국 플랫폼들이 차별화를 꾀하면서다. 올 1월 출범한 ‘킷츠’는 K팝 팬덤을 정조준하며 시청 연령층을 한껏 낮췄다.
키다리스튜디오는 지난 5월 숏드라마 플랫폼 ‘레진스낵’을 론칭하며 천만 감독(‘극한직업’(2019)의 이병헌)부터 독립 영화계 신예(‘더스트맨’(2020)의 김나경)까지 방송·영화계 인력을 두루 영입해 10개의 완결된 숏드라마를 한꺼번에 공개했다. 레진스낵은 앞으로 레진코믹스의 히트작 IP(지적재산)까지 총동원, 연간 40~50개의 오리지널 작품을 제작할 계획이다.
영화계에선 숏드라마가 위축된 영화산업, 포화 상태에 이른 OTT(온라인 스트리밍) 시리즈를 대체할 블루오션으로 주목받는다. 인공지능(AI) 도입으로 제작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도 긍정적 요소다. 반면, 폭력성·선정성이 지나치게 높아지며 문제를 야기한 해외 숏드라마의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나갈지 주목된다. 4일 본지와 따로 만난 이준익 감독은 “기성 감독뿐 아니라, 데뷔를 준비해온 재원들이 숏드라마로 대거 유입되고 있다. 포맷과 관계없이 결국은 다 이야기 산업”이라면서 “중국과 미국이 선도한 시장에 후발주자로서 K콘텐트, 한국영화의 문법을 이식시키는 과정이 시작된 것 같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