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삶의 향기] 내 인생의 뷔페

중앙일보

2026.07.06 08:10 2026.07.06 14:08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뷔페를 처음 가본 건 언제였을까? 제미나이에 물으니 한국 최초의 뷔페는 1958년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내에 문을 연 스칸디나비안 클럽이라고 알려준다. 6·25 전쟁 이후 의료원 설립을 돕기 위해 한국에 온 스칸디나비아 3국 의료진과 관계자들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북유럽의 전통 요리 방식인 빵, 버터, 절인 청어, 육류 등 다양한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마음대로 골라 먹는 뷔페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1996년에 처음 갔던 북유럽에서 뷔페를 먹던 생각이 난다. 여행 내내 훈제 연어와 청어를 실컷 먹었던 맛의 기억이 북유럽 풍경들을 배경으로 어제인 듯 떠오른다. 회원들만 갈 수 있었던 고급 뷔페로 시작해서 50년간 한국 뷔페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했다는 스칸디나비안 클럽은 2012년에 영업을 종료했다고 제미나이가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2012년에 친구와 함께 마지막으로 그곳의 조촐한 뷔페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최초의 호텔 뷔페는 1973년에 오픈한 조선호텔 뷔페다. 축제가 없던 시절, 어쩌면 뷔페식당은 살만한 사람들에게만 문을 열어주는 화려한 축제의 장이었다. 마음껏 골라 먹는 자유, 그처럼 좋은 게 또 있으랴.

책 냈다고 암 투병 후배가 초대
많이 먹으라는, 그리운 말 한마디
오늘은 남은 인생의 첫 번째 날

[그림 황주리]

[그림 황주리]

식욕이 왕성했던 시절, 아버지는 생일날 뷔페를 사주시며 많이 먹으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아니 평생 나의 아버지는 많이 먹으라 하신 적이 없다. 남기지 않을 정도로만 덜어오라 하셨다. 식탐이 많았던 나는 늘 접시 수북이 음식을 덜어와 결국은 남겨서 꾸중을 듣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뷔페식당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1998년 뉴욕에 살던 시절 친구와 함께 캐리비안 크루즈 여행을 했다. 길고 지루한 항해 끝에 목적지에 내려 천국 같은 섬들을 돌아보고 다시 배로 돌아와 자정이 되면 미드나이트 뷔페가 열린다. 애니메이션 영화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자정에서 새벽 2시까지 세상의 모든 음식과 갖은 종류의 술들이 쌓여있던 뷔페에서 매일 밤 실컷 먹고 마시면서 함께 했던 이웃 중 하나가 생각난다. 누나가 세상 떠난 뒤 뒤 매형과 함께 환갑 여행을 온 미국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는 목적지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고 배 안에 머물렀다. 식사할 때 옆자리에 앉은 적이 여러 번 있어 한번은 물어보았더니, 매형이 처남 뱃삯까지 내줘서 왔기 때문에 도착지마다 돈을 더 내야 하는 낭비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이 하필이면 왜 크루즈 여행을 왔는지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사연이다. 싱글 파티라는 것도 매일 밤 열렸는데, 65세 이상만 들어갈 수 있어서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많게만 여겨지던 나이도 어느덧 지나가고 다들 그렇듯 식탐이 많이 없어졌다. 식욕뿐 아니라 모든 욕심이 줄어드는 건 다행한 일이다. 남이 알아주는 것에 나는 점점 더 무심해지고 있다. 살아있으므로 숨 쉬는 것처럼 계속 쓰고 그린다.

며칠 전엔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고 번 아웃이 된 나를 친한 후배가 호텔 아침 뷔페에 초대했다. 평소에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침 일곱 시에 호텔의 뷔페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너무 많은 사람이 아침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열여섯 소녀처럼 가냘픈 내 사랑하는 후배가 저쪽에서 웃으며 손짓한다. 그녀는 갑자기 발병한 암 투병을 끝내고 회복기에 들어섰다. 오직 천천히 시간을 들여 씹으며 오랜 시간 먹는 일이 요즘 그녀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뷔페는 영양가 최고의 식당이 아닐 수 없다. 천천히 먹지 않으면 음식이 귀로 들어간다며 그 귀엽던 얼굴을 찡그린다. 아픈 사이 내 선배가 되어버린 그녀의 성숙한 마음을 본다.

아파보니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밖에 없더라며 “많이 먹어” 한다.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말이다. 미워하지 않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그래도 희망이다. 사람이 희망이고 날씨가 희망이고 입맛이 사랑이 다 희망이다. 때로 그 희망이 컴컴한 절망의 얼굴을 한다고 해도.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희망은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고통이라 해도. 오늘 아침 친구가 보내준 카톡의 익숙한 구절처럼 오늘은 정말 우리의 남은 인생 중 첫 번째 날이 아닌가?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