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급증으로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하면서 글로벌 3대 메모리 기업의 증설 경쟁에 불이 붙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중국까지 가세하며 국가 간 반도체 패권 전쟁도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6일 외신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세계 3위 메모리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은 지난 4일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첨단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 공장 착공에 돌입했다. 총 투자액은 1조5000억엔(약 14조원) 규모로 일본 정부가 최대 5000억엔(약 4조7000억원)의 파격적인 보조금 카드를 꺼냈다. 이곳에서 생산될 첨단 HBM은 2028년 여름 출하를 목표로 엔비디아 등에 공급된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의 대담함과 일본의 장인정신이 만나면 타협은 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이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
각국 메모리 기업들이 증설을 서두르는 건 폭발적인 AI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서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메모리 생산 능력이 연평균 19% 안팎으로 늘어나더라도 AI발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서 당분간 노트북PC·자동차·가전용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지속할 것으로 내다봤다.
메모리 세계 1·2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지난달 29일 서남권에 800조원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팹) 4기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시 “천문학적 규모의 기업 투자, 정부 지원이 어우러진 국가 대항전이 펼쳐지고 있다”며 “오직 속도전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가운데)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정부를 등에 업은 중국의 추격세도 매섭다. 로이터는 “중국 최대 D램 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는 상하이 신규 공장 등을 통해 웨이퍼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천정부지로 오른 메모리 몸값에 빅테크(대형 기술기업)들도 중국산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애플은 중국 판매용 기기에 들어가는 메모리 부품을 CXMT 등에서 구매하는 방안을 협의 중이다. 이와 관련 경계현 삼성전자 고문은 지난 5월 “중국 기업들의 생산 능력 확대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12~13% 수준까지 치솟을 수 있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실제로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CXMT의 1분기 점유율은 1년 만에 3%에서 8%로 뛰었다.
다만 대대적인 증설 경쟁이 장기 호황을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공장은 착공부터 양산까지 통상 3년 이상 걸리는 만큼, 현재 증산되는 물량이 2028년 전후로 한꺼번에 쏟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최근 메모리 업계에서 확산하고 있는 ‘전략적 고객 계약(SCA)’은 이 같은 ‘보릿고개’ 리스크를 상쇄할 장치로 꼽힌다. 이 계약에는 구매자가 약정 물량을 다 인수하지 않더라도 일정 금액을 무조건 지급하는 ‘테이크 오어 페이(Take-or-Pay·인수 또는 대금지급)’ 조항이 포함된다. 공급사가 홀로 부담하던 가격과 물량 변동 위험을 고객사와 나누는 장치다.
이은택 KB증권 연구원은 “과거에는 업황이 꺾이면 고객사가 출하를 미루면서 리스크가 대부분 공급사에 전가됐지만, 메모리 가격과 물량 리스크를 고객이 함께 부담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며 “다만 AI 투자 사이클이 예상보다 크게 둔화할 경우 이러한 계약의 실효성이 실제 시장에서 얼마나 지켜질 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