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로 복귀한 주한규 전 원자력연구원장이 지난 3일 서울대 캠퍼스에서 문무대왕과학연구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그의 정장 상의 깃에 꽂힌 배지가 눈에 띄었다. 핵 주위로 전자가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원)자력이 배지’라고 했다. 주한규 (63)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지난달 30일 3년 6개월간의 한국원자력연구원장 임기를 마치고 막 학교로 복귀한 터였다. 지난 3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36동을 찾아 그를 만났다. 자력이 배지가 뭐냐는 질문에 "먼저 교수 시절 달고 다니던 탈원전 반대 및 원전 살리기 운동 배지였는데, 원장 시절 내려놓고 있다가 어제부터 다시 달았다"고 말했다. 강단으로 돌아오자마자 교수 시절 뜨거웠던 초심을 상징하는 배지부터 다시 단 것이다. 그가 관악으로 돌아온 지난 주말은 마침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지형도가 요동치는 시점과 맞물렸다. 정부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라는 폭발적인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신규 원전 건설 검토를 언급하고, 심지어 '호남 지역 원전 추가'라는 파격적인 카드까지 테이블 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애초 원전을 꺼리던 민주당 정부로선 이례적인 일이다. 주 교수는 윤석열 정부 출범과 동시에 원자력연구원 원장직을 맡아 '원전 생태계 복원'의 최전선에서 뛰었던 인물이다. 그는 정권이 다시 민주당으로 바뀌고도 1년을 더 원장을 지냈다. 주 교수에게 최근 급변하고 있는 한국 원자력 정책에 대해 물었다.
인공지능 시대, 원전은 필수
MMR도 언급한 대통령 놀라워
원전, 확실한 한국 미래 먹거리
수명연장, 핵폐기물 해결해야
경북 경주시 감포읍에 들어서는 문무대왕과학연구소 조감도. 사진 경주시
탈원전 장관의 이례적 변신
Q :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과 관련해 "원전 증설을 고민하겠다. 실제로 영광에 원전 2기분의 부지가 있다"고 이례적인 입장을 밝혔다.
(김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과 현 정부 초기까지만 해도 원전 확대 반대와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환을 주장해온 대표적 인사다.)
A : 늦은감이 있지만 이재명 정부가 이제라도 원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신규 원전 건설 가능성을 열어둔 실용주의 노선은 매우 긍정적인 변화다. 사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에 필요한 전력 수요만 6.3GW다. 김성환 장관의 발언을 계기로 호남 지역 주민의 원자력에 대한 공감도가 높아져 실제로 영광에 신규 원전 건설이 추진된다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재생에너지를 앞세운 전력 공급 계획이 문제다.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는 저비용으로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원전이 가장 적합하다. 풍력이나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는 변동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안정적 공급을 하려면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나 LNG 비상 발전원을 필수적으로 붙여야 하는데 이는 전력 비용을 폭발적으로 상승시킨다. 최소한 하루 발전량의 반 이상을 저장할 ESS 규정을 의무화하지 않고 재생에너지를 크게 늘리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Q :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수립이 진행 중인데.
A : 현 정부가 목표로 하고 있는 메가 프로젝트를 수행하려면 최소한 신규 대형원전만 4기가 더 필요하다. 탄소중립 목표를 위해 기존 노후화한 석탄화력도 소형모듈원전(SMR)으로 바꿔야 한다. 2026~2040년 전력수요·공급 계획의 근간이 될 12차 전기본에 이 같은 건설계획이 대폭 들어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위주로는 이룰 수 없는 목표다.
Q : 지난 11차 전기본에도 대형원전 2기와 함께 SMR 1기가 포함됐다. 왜 SMR인가.
A :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원전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AI 데이터 센터가 요구하는 엄청난 양의 전력을 24시간 내내 안정적이면서도 저비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저부하 전원이 원자력, 특히 SMR이기 때문이다.
(SMR은 대형원전보다 발전 용량은 적지만 안전성이 높고 입지 선정이 자유로우며 건설 기간도 짧다. 또한, 기후나 시각에 따라 발전량이 널뛰는 재생에너지와 달리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고, 출력을 신속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강점을 지닌다.)
Q : 우리나라가 개발 중인 SMR은(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
A : 기술 성숙도 면에서 우리는 이미 2024년에 표준설계인가를 받은 스마트(SMART) 원자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i-SMR은 2028년 인허가 획득을 목표로 개발 중이다. 미국 뉴스케일이 먼저 인허가를 받았지만, 경제성 문제로 프로젝트가 취소됐다. 세계적으로 실제 가동 중인 SMR 실증로는 아직 없다. 우리가 2034년 기장 i-SMR 첫 호기 가동 목표를 달성한다면 충분히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 다만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국내 실증화를 과감하게 추진해 독보적인 제조 공급망을 선점해야 한다.
주한규 전 원자력연구원장이 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소형모듈원전(SMR)을 설명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아파트단지에 초소형원전 들어설 것"
Q : 이재명 대통령은 SMR을 넘어 MMR(마이크로모듈 원자로)까지 얘기했다.
A : 놀랍고도 고무적인 일이다. MMR은 컨테이너 크기로 이동이 가능하며 10MW급 출력을 내는 초소형 원자로다. 미국은 군사기지나 우주선, 달 기지용으로 원자로를 개발해 왔고, 내년 가동을 목표로 인허가 체제를 완전히 쇄신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역시 우주 및 극지용 MMR 연구를 4~5년 전부터 착수해 핵심인 히트파이프 타이핑 실험과 개념 설계를 이미 마친 상태다. 향후 국민적 수용성이 개선된다면 대학 캠퍼스, 대형 아파트 단지, 대형 산단 옆에 MMR을 직접 두고 유연하게 전력을 공급하는 획기적인 시대가 열릴 것이다.
Q : 원전이 한국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을까.
A : 원전은 한국의 확실한 미래 먹거리다. 미국은 설계 중심의 스타트업 위주이고 프랑스와 일본은 공급망이 많이 무너졌지만, 한국은 지난 30여년간 꾸준히 원전을 건설해와 독보적인 제조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고, 덕분에 가장 싸고 효율적으로 원전을 지을 수 있는 독립된 역량을 갖추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막강한 기술력으로 유럽과 제3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지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 스타트업들조차 한국의 제조 역량에 손을 내미는 형국이다. 원전이 미래 먹거리로 확고히 자리 잡으려면 국내에서 신한울, 영덕 부지 건설과 혁신형 SMR 실증을 과감히 추진해 생태계를 끊임없이 돌려야 한다. 나아가 고준위 폐기물 처분 문제와 수명 연장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국민의 원전 불안감을 과학적으로 해소해 정치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법적 기반을 다져야 한다.
김영희 디자이너
원전 인재양성 정책 흔들리지 말아야
Q : 원자력연구원장 재임 기간 보람 있었던 것과 아쉬움을 꼽자면.
A : 가장 보람 있었던 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위축됐던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고, 연구원의 중심을 미래지향적인 선진 원자로 개발로 전환한 것이다. 현대건설·포스코·삼성 등 민간기업의 투자를 끌어내 선진 원자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미국 미주리대에 연구용 원자로 설계를 역수출하는 결실을 봤다. 반면 문무대왕과학연구소 건설이 규제 기관의 과도한 인허가 심사로 2년이나 지연된 점은 아쉽다.
(경주 동해안 감포에 건설 중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는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기술 개발과 실증·상용화를 담당하는 차세대 원자로 연구기관이자 한국원자력연구원의 분원이다. 2021년 착공 이후 행정·교육 시설 등을 포함한 1단계 건물의 공정률은 80% 선을 넘겼다. 하지만 핵심 과제인 선진 원자로 실험로 본 건설은 규제기관의 인허가 지연으로 착공이 늦어져, 전체적인 최종 완공과 가동 시점은 당초 예상보다 지연된 2030년 이후가 될 전망이다.)
Q : 다시 강단에 섰다. 원자력 인재 양성은 어떤가
A : 과거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전공 희망 학생 수가 급감하는 등 인재 양성 생태계가 큰 타격을 입었으나, 최근 정부의 원전 복원 기조와 AI 시대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 확대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학계 분위기는 점차 회복되고 있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인재 양성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원전 육성 정책의 법제화가 시급하다. 강단으로 복귀하며 가장 집중할 부분은 원전의 과학적 안전성에 대한 대국민 소통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오랜 가동 이력으로 증명된 위험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미래 인재들이 자부심을 품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육 체계를 다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