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전에서 홍명보 감독과 벤치에 있던 손흥민(왼쪽)이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출신 손흥민(LAFC),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파리생제르맹), 황희찬(울버햄프턴), 황인범(페예노르트). 소속팀 간판만 나열해도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 ‘황금세대’라 칭송받던 그들은 어째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현장에서 그들을 계속 지켜 본 나의 눈에는 피치 위의 전술 뿐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북중미 월드컵 기간 멕시코 현장에서 한국축구대표팀을 밀착취재한 일본 재일동포 축구전문가 신무광 기자가 지난 6일 일본 스포츠전문지 넘버에 3부작 기사를 통해 전말을 밝혔다. 신 기자는 미즈노 스포츠라이터 최우수상 수상자이자, 지난해 홍명보 한국 감독과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의 특별 대담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기사 내용은 앞서 중앙일보가 보도했던 한국축구대표팀 내분 문제와 대부분 일치한다.
신 기자는 “체코전 이틀 전 일부 취재진이 훈련 도중 손흥민의 병역 특례를 조롱한 음성이 확산되면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손흥민은 체코전 이후 한국 미디어의 취재를 완전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진짜 문제는 손흥민과 미디어의 갈등이 팀 전체로 번지면서, 다른 선수들마저 미디어 취재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됐다는 점”이라고 상황을 전했다.
이어 “기자단 대표가 선수단 앞에서 사과하는 이례적인 사태로 번졌지만, 손흥민과 동세대인 이재성(마인츠) 등이 수긍하지 않아 대표팀이 취재에 응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일주일 가까이 지속됐다. 일부 선수들 사이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팀에 명백히 불필요한 잡음이었다. 불필요한 공기가 고스란히 이어진 멕시코전에서 골키퍼 김승규와 수비수 이기혁이 엉키는 뼈아픈 실책이 터졌다”고 분석했다.
손흥민과 이재성이 벤치에서 남아공전을 지켜보고 있다. 뉴스1
홍 감독이 멕시코전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하던 손흥민에게 “왜 네가 얘기하냐. 내가 얘기해야지. 어서 빨리 나가자”는 취지로 말한 데 이어 선수들에게 미디어와 관계 회복을 제안했다는 진종오 국민의힘 의원의 주장을 인용했다. 신 기자는 “이 대화만으로 대립이나 내분이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감독은 팀의 질서를 지키려했고, 주장은 선수들의 분위기를 대변하려 했다. 그 두 가지 책임감으로 인해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해석했다.
이어 “야유의 직접적 대상이었던 손흥민이나 이재성처럼 취재거부를 당연한 항의로 여기는 베테랑이 있었던 반면, 다른 선수들이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거리감에는 온도차가 있었다”면서 “대회 후 보도된 두 가지 사건 이후 감독과 주장, 베테랑과 중견 선수들 사이에서 저마다 다른 온도차가 존재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팀은 좀처럼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고 팀이 흔들린 배경을 전했다.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남아공전에서 패한 뒤 손흥민이 고개를 숙인 채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강정현 기자.
논란이 됐던 홍 감독의 손흥민 기용법도 짚었다. 신 기자는 “34세 손흥민은 과거 프리미어리그를 휩쓸었던 압도적 스프린트 능력과 폭발적인 스피드에 명백한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상태였다. 체코전과 멕시코전에서도 수비진 사이에서 완전히 고립됐고, 교체아웃이 너무 빠르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면서 홍 감독이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전했다 .
이어 “비기기만 해도 조별리그 통과가 확정되는 남아공전에서 홍 감독은 절대적 에이스 손흥민을 선발에서 제외하는 대단히 큰 도박을 감행했다. 전술적 선택이라고 적어도 감독은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결과는 잔혹했다”고 글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신 기자는 “한국의 탈락은 비단 홍 감독의 용병술 실패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와의 대립, 스타선수를 향한 과도한 의존, 세대간의 거리감, 감독 선임 프로세스를 둘러싼 대한축구협회를 향한 불신까지. 그동안 누적되어 온 수많은 문제점이 월드컵이라는 극한의 무대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해석했다.
지난달 30일 귀국한 홍명보 감독과 1일 들어온 손흥민. 뉴스1
지난달 30일 귀국한 홍 감독에게는 격렬한 야유와 살벌한 공기가, 1일 귀국한 손흥민을 둘러싼 공기는 별천지 같았다고 묘사했다. 신 기자는 “홍명보를 과도하게 옹호할 생각은 없다. 남아공전 판단은 결과적으로 실패였고, 팀을 끝까지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하지만 공항에서 쏟아진 모든 비판이 공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전적으로 홍 감독만 비판하는 시선은 옳지 않다고 소신발언을 했다.
이어 “그렇다고 손흥민을 탓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축구를 위해 달려왔고, 골을 넣었고, 비판을 감내하며 대표팀 얼굴로 자리해왔다”며 “그러나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컸던 탓에 한국대표팀은 언젠부턴가 ‘손흥민을 축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의 의존증에서 탈피할 것인가’란 중요한 결단을 끊임없이 미루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홍명보가 그 결단을 이번 월드컵 무대에서 내리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아공전이야말로 그 결단의 증거였고, 그리고 실패했다”고 짚었다.
홍명보 감독과 손흥민. 강정현 기자
신 기자는 “멕시코에서 한국 대표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다만 한국축구를 위해 떠난다고 말하며 사실상 추방당한 과거의 영웅과, 한국 축구의 상징으로서 앞으로도 대표팀에 남기로 결심한 수퍼스타. 그 둘 중 어느 누구도 승자는 아니었다”며 “한국 축구에 몰아칠 냉혹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 사실이 지닌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