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평등 수준은 세계 148개국 가운데 101위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5 글로벌 성별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별격차지수는 68.7%로 작년보다 0.9%p 올랐지만 전체 순위는 전년 94위에서 오히려 후퇴했다. 대부분 OECD 회원국이 상위권에 포진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성장축으로 떠올랐지만 노동, 돌봄, 정치 참여, 디지털 환경에서는 여전히 성별 격차가 뚜렷하다. WEF는 현재 속도라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성별 격차를 해소하는 데 179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오픈소사이어티재단(Open Society Foundation·OSF)이 동아시아의 젠더 이슈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OSF는 학교를 짓거나 식량을 지원하는 대신 시민사회가 젠더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고 해법을 실험하는 데 기부금을 투입한다. 젠더를 복지나 여성 정책의 하위 영역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보기 때문이다.
OSF는 지난 2021년 여성 리더십 확대를 위해 1억 달러(약 150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재단은 “포용적이고 평화로운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페미니스트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OSF가 최근 동아시아의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젠더 문제가 사회 구조적 문제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임금격차나 성폭력 같은 개별 의제로 접근했다면 지금은 노동시장, 돌봄, 디지털 기술, AI, 정치 참여, 기후위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문제와 연결된다. 둘째, 동아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젠더 평등의 제도와 문화는 더디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운동 및 활동 지원사업’ 오리엔테이션에서 조승연 공존무브먼트 활동가가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다음세대재단]
다음세대재단과 OSF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인권운동 및 활동지원사업’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됐다. 두 재단은 지난해 11월부터 ‘젠더 정의(Gender Justice)’를 실현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지원 규모는 단체 최대 2000만원, 프로젝트팀 최대 1000만원이다. 운영비 사용에 제한을 두지 않은 점도 특징이다. 사업비를 정해진 활동에만 쓰게 하는 방식보다, 작은 시민사회 조직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번 지원사업의 특징은 젠더 정의를 제도나 담론의 언어에만 가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정된 팀들은 기술, 신체, 교육, 예술, 커뮤니티를 통해 시민이 직접 경험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과거 인권운동이 교육과 세미나, 캠페인을 통해 사회를 설득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사업은 시민이 직접 배우고 움직이며 공감하는 활동이 많다.
여성을위한열린기술랩이 개발한 전자회로키트 ‘하트-빛(HEARTBEAT)’ 키링을 참여자들이 직접 납땜해 완성하고 서로의 고유한 맥박 속도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여성을위한열린기술랩]
여성을위한열린기술랩은 기술 영역에서 젠더 정의를 묻는 단체다. 이들은 AI와 알고리즘, 게임, 디지털 노동 안에 숨어 있는 젠더 편향을 다룬다. 전유진 대표는 “기술은 순수하거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산물”이라며 “데이터와 알고리즘,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결국 인간의 개입과 사회의 편견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대표 프로그램인 ‘융해하는 금속’은 을지로 금속가공 기술자와 여성 창작자를 연결하는 7주 과정이다. 참가자들은 모델링과 도면 작성, 금속 오브제 제작까지 직접 경험한다. 경쟁률이 10대1에 이를 정도로 인기다. 전 대표는 “초기에는 여성들에게 기술이 왜 재미있고 중요한지 설득해야 했다”며 “이제는 기술에 관심 있는 여성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공존무브먼트의 자기방어훈련 원데이클래스에서 참여자들이 안전거리 확보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공존무브먼트]
공존무브먼트는 성폭력과 폭력의 문제를 ‘몸’의 경험으로 풀어낸다. 아직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는 단계지만 자기방어 훈련을 기획해온 활동가들이 모였다. 합기도 선수 출신인 박은지 팀장은 자기방어 훈련의 목적이 호신술 습득에만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프로그램을 듣는다고 갑자기 호신술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움직일 수 없을 것 같고 대응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실제로 대응하고 빠져나가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존무브먼트의 활동은 폭력 피해 여성 쉼터에서 진행하는 소규모 워크숍부터 노동조합 대상 대규모 강연까지 다양하다. 지난 1년간 진행한 교육은 40~50회에 이른다. 박 팀장은 “요즘은 여성들의 신체 활동 참여도가 높아졌고 복싱이나 주짓수처럼 적극적인 격투기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여성도 늘었다”고 말했다.
교사 네트워크인 ‘아웃박스’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차별을 처벌이 아닌 성평등 교육으로 해결하는 모델을 실험한다. 교육상담연구소 ‘아하’는 영유아 보호자를 위한 포괄적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사각사각 역시 성평등한 교육환경을 만드는 연구와 교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사회와 만나는 시도도 포함됐다. 오리집은 퀴어와 로컬의 이슈를 놀이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아트 콜렉티브로 1인 가족, 대안 가족, 퀴어 가족 등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사진으로 기록해 사진전을 개최했다. 먼쓸리퀴어는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팀이다. 매달 서울, 대전, 목포 등 여러 지역에서 퀴어의 삶과 경험을 담은 서사를 낭독극 형태로 선보이며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힘을 쌓아가고 있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인권운동도 전국 단위의 대형 시민단체 중심에서 교육자와 개발자, 예술가, 게임 제작자, 지역 커뮤니티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다”며 “이런 작은 실험들이 쌓여 결국 사회의 인식과 제도를 바꾸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