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장혜수의 뉴스터치] 케이블타이의 두 얼굴

중앙일보

2026.07.09 08:06 2026.07.09 13:3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장혜수 선임기자

장혜수 선임기자

1956년 미국 전기용품업체 토머스앤드베츠(T&B)의 엔지니어 모리스 로간은 항공기 제조사인 보잉의 공장을 방문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항공기에 전기·전자 설비가 막 도입되던 때였다. 기체 내부에 들어가는 전선 더미(와이어 하네스)만 수천m였다. 노동자들은 나일론 끈으로 전선 더미를 일일이 묶었다. 단단한 끈을 꽉 쥐고 당기다 보니 손은 온통 피투성이가 됐다. 로간은 다치지 않으면서도 업무 효율을 높일 방법을 고민했다. 2년간의 연구 끝에 별다른 장비 없이 손으로 당겨 전선 더미를 묶는 제품을 발명했다. T&B는 타이랩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했다. 케이블타이가 탄생한 계기다.

케이블타이는 한 번 조이면 자르기 전까지 풀리지 않는다. 한쪽으로는 부드럽게 당겨지지만 반대로는 움직이지 않는 역전 방지장치(래칫) 때문이다. 당시는 미국·소련 간 우주 및 군비 경쟁이 치열하던 때였다. 우주선·인공위성·전투기 등의 제조에 케이블타이는 필수품이었다.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낸 건 수사기관들이다. 가볍고 튼튼하고 한 번 조이면 풀리지 않는 점에 착안해 1960년대 미국 수사기관들이 케이블타이를 임시 수갑 등 범죄자 결박 도구로 활용했다. 납치·강도 등의 범죄자들이 범죄 대상 결박에 케이블타이를 활용한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지난 5월 일면식 없는 여고생을 살해한 일명 장윤기 사건에서 케이블타이가 혐의 확정의 스모킹건으로 떠올랐다. 범죄 당시 장윤기가 탔던 차량 블랙박스에 차 안에 있던 케이블타이 뭉치가 찍혔다. 이번 사건이 성폭행 및 납치 목적 계획범죄임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다. 케이블타이 뭉치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사라졌다가 장윤기 부친 집 압수 수색 때 발견됐다. 경찰관인 부친이 아들 혐의를 감추려고 증거를 빼돌린 정황이다. 단순 살인으로 끝날 뻔한 이번 사건의 이면이 드러난 건 검찰의 보완수사 덕분이었다.

부상을 염려해 발명한 케이블타이가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없애는 게 능사일까. 제도도 사물도 다 쓸모와 이유가 있어 만든 거다. 잘 쓰냐 잘 못 쓰냐가 관건이다. 없앤다면 잘 쓸 기회마저 사라진다.





장혜수([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