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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의 시선] 우리 모두 디지털 형틀에 묶일 수 있다

중앙일보

2026.07.09 08:14 2026.07.0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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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논설위원

김원배 논설위원

중세 유럽에는 죄인의 머리와 손을 끼우는 ‘필러리(pillory)’라는 형틀이 있었다. 조선시대 죄인의 목에 채우던 ‘칼’과 비슷하지만, 아예 이 상태로 광장에서 군중의 조롱이나 처분을 받도록 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돌을 맞을지, 꽃을 받을지는 죄의 무게보다 군중의 정서에 달려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는 1703년 비(非)국교도 탄압 주장을 풍자했다가 명예훼손죄로 벌금과 함께 3일간 형틀에 묶였다. 하지만 런던 군중은 그에게 돌 대신 꽃을 던지며 성원했다고 한다. 형틀에 묶여 누구는 목숨을 잃었고, 누구는 찬사를 받았다. 집행의 일부를 대중에게 나눠준 것이지만, 지은 죄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이 유지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배재고 야구부와 ‘무섭노’ 파문
과잉 처벌과 일베몰이는 곤란
도덕적 응징의 폭주 경계해야

이 제도는 1837년 영국에서 폐지됐다. 하지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이 상황을 바꿔놨다. 『So You’ve Been Publicly Shamed(당신은 조리돌림을 당했다)』의 저자인 존 론슨은 “형틀이 법으로 금지된 지 180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타인의 형벌 수위를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고 지적했다(2015년 가디언지 영상). 이번엔 검사의 기소도, 법원의 판결도 필요 없다. 분노한 게시글과 공유, 리트윗이면 충분하다. 여기에 ‘근조 화환’ 같은 오프라인 낙인까지 더해진다.

배재고 야구부가 경기 중 광주일고를 향해 5·18을 조롱하는 구호를 쓴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6개월 출전 정지를 내렸고, 선수들은 광주일고를 찾아 사과했다. 광주일고 교장은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 학생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건 우리가 바라는 길이 아니다”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피해 당사자가 선처를 말하는데, 사건 바깥의 사람들이 더 강한 처벌을 고집하면 그 분노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잘못은 지적해야 하지만, 전체 배재고 학생을 비난하고 학교 앞에 근조 화환까지 세우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고교 시절 범죄 전력이 드러나 은퇴한 배우 조진웅을 두고 일부 진보 인사들은 “어린 시절의 실수”라고 옹호했다. 그런데 배재고 학생들에게는 용서와 관용을 얘기하지 않았다. 잘못의 성격과 정도보다 누구 편이냐가 중요한 세상이다. 일부 보수 인사들이 응원 화환을 보내는 것도 부적절하다. 근조 화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나, 이는 배재고 야구팀의 잘못을 가리고 5·18 조롱 문제를 다시 진영 대결의 소재로 만드는 일이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도덕은 사람들을 묶어주지만, 동시에 눈멀게 한다”고 했다. 같은 편이 함께 분노할 때 우리는 더 단단히 결속하지만, 바로 그 결속 때문에 상대를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응징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쉽다.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이 잔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디지털 형틀이 실제 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한 걸그룹 멤버가 경상도 사투리로 “무섭노”라고 말한 것을 두고, 경남MBC의 한 PD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가 “일베식 표현”이라 지목했다. 이것만으로는 일베식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앞서 문제가 된 응원 구호는 광주일고를 대상으로 ‘스타벅스 가야지’와 ‘탱크데이’가 겹쳐 있다. 하지만 무섭노는 그런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럴 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는데도 디지털 형틀에 세워진다면, 그 형틀이 다음엔 누구를 향할지도 알 수 없다. 농담 하나, 사투리 하나, 오래전 행동 하나, 잘못 전달된 말 한마디가 순식간에 나를 형틀에 가두고 조리돌림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런 무시무시한 디지털 형틀은 공고하게 자리 잡았고, 모두가 손에 쥔 돌을 내려놓지도 않을 것이다. 해법은 없을까. 일부 꽃배달 업체가 학교를 겨냥한 시위성 화환 주문에 응하지 않거나 취소·환불을 했다고 한다. 대중의 분노가 온라인·오프라인 낙인과 과잉 처벌로 폭주하는 길목에서, 누군가는 멈춤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그 돌을 던지기 전에, 디지털 형틀에 묶인 이가 정말 잘못했는지, 그 돌이 치명상을 입히지나 않을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하이트의 말대로 우리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 편을 가르는 ‘옹졸한 도덕심’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자. 사람은 완벽하게 중립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비례의 감각까지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김원배([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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