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요한 오후, FM 91.5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세자르 프랑크 (Cesar Franck)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를 듣다가, 오래전 엔시노(Encino)에 있는 한 교회에서 열렸던 첼로와 피아노 연주회에 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교회안에는 많은 한인과 지역 주민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고, 음악회는 조용한 기대감 속에서 시작되었다.
첫 연주곡은 로베르트 슈만의 ‘아다지오(Adagio)와 알레그로(Allegro) A♭장조, Op.70’. 느린 아다지오 부분에서 들려오는 첼로의 조용한 음률은 깊은 서정 속에서 그리움과 평온함이 동시에 다가오면서 지나온 삶을 조용히 돌아보게 하였다.
이어 알레그로(빠른 부분)로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한순간에 밝아지며 피아노와 첼로가 함께 생동감 있는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서는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가는 힘과 희망을 느꼈다.
다음 곡으로 연주된 요하네스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제1번 E단조, Op.38’은 화려하기보다는 깊고 품위 있는 음악이었다. 첼로와 피아노는 서로 대화하듯 조화를 이루었고, 때로는 담담하게, 혹은 따뜻하게 흐르며 삶의 여러 감정을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다.
연주를 듣는 동안 첼로의 4개의 조율선 위를 우아하게 움직이는 두 손과 피아노 건반 위를 오가는 손길은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처럼 느껴졌다. 음악 속에 잠겨 있던 나는 중간 휴식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디선가 읽었던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Life is like a piano.
The white keys represent happiness, and the black keys show sadness.
But as you go through life's journey, remember that both keys create music.”
“인생은 피아노와 같습니다.
하얀 건반은 행복을, 검은 건반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을 걸어갈 때, 이 두 건반이 함께 어우러져
음악을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피아노에는 총 88개의 건반이 있다. 그중 52개의 흰 건반은 밝음과 기쁨을, 36개의 검은 건반은 슬픔과 고독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음악은 어느 한쪽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고, 모든 음률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깊은 화음이 탄생한다.
우리의 삶 역시 행복과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론 어려움과 고통도 찾아온다. 그러나 희망과 절망, 웃음과 눈물이 함께 어우러지며 우리는 조금씩 삶의 의미를 배워가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민 생활 역시 피아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다른 음을 가진 88개의 건반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생활방식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소통의 어려움도 있고 문화적 차이로 인해 낯설고 힘든 순간도 있으나 서로 다른 음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을 이루듯, 우리의 이민 생활 또한 서로 다른 삶들이 어우러지며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연주회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된 세자르 프랭크의 'A장조 소나타'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시작됐지만, 곧 깊고 강렬한 감정으로 이어졌다. 첼로와 피아노는 서로 대화하듯 아름답게 흐르며 사랑과 열정, 그리고 성숙한 평온함을 들려주었다. 마치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음악으로 듣는 듯했다.
강렬한 에너지와 열정의 여운을 가슴에 안은 채 405번 프리웨이를 달려 집으로 오면서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한 사람의 인생 연주가 끝나는 날,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그가 남기고 간 삶의 선율을 가슴에 품은 채 조용히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