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5'가 개봉 한 달도 안 되어 전세계 8억 달러 이상의 극장 매출을 휩쓸며 역대 '토이 스토리' 최고 흥행을 넘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올해 탄생 31주년을 맞은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40주년까지 속편을 이어갈까. 한때 첨단 기술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할리우드의 경계를 넓혔던 디즈니/픽사 스튜디오가 고민에 빠졌다. ‘토이 스토리 5’의 세계적 흥행으로 최근 오리지널 각본 작품들의 잇따른 흥행 부진은 만회했지만,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있다는 지적을 면치 못하면서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9일 ‘토이 스토리 5’가 전날까지 전 세계 8억 860만달러(약 1조 2217억원)의 극장 매출을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이 작품은 지난달 17일 한국을 필두로 북남미·일본·영국·중국 등지에 차례로 개봉해, ‘몬스터 대학교’(2013) ‘업’(2009)을 제치고 역대 픽사 애니메이션 전 세계 흥행 9위에 올랐다. 한국에선 9일 누적 234만 관객을 돌파했다(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이런 추세라면 ‘토이 스토리 4’(2019)의 10억 7384만달러(박스오피스모조)를 넘어 시리즈 최고 흥행작이 될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픽사가 제작비 본전 찾기에 급급했던 ‘엘리오’(2025), ‘호퍼스’(3월 4일 개봉) 등 전작들이 신인 감독의 오리지널 각본 작품이란 점에서 ‘토이 스토리 5’는 구관이 명관이란 평가가 나온다.
올 3월 개봉한 ‘호퍼스’는 무난한 호평과 함께 손익분기점은 넘었지만, 미국 매체 벌처는 “‘아바타’와 비슷한 설정”을 지적하며 “픽사의 아이디어가 고갈되기 시작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AP=연합뉴스]
‘토이 스토리 5’를 공동 각본‧연출한
앤드류 스탠튼은 픽사에서 ‘벅스 라이프’(1998), ‘니모를 찾아서’(2003)와 속편 ‘도리를 찾아서’(2016), ‘월-E’(2008) 등 스튜디오의 황금기에 일조한 ‘금손’으로 통한다. 그는 픽사에 9번째로 입사한 원년 멤버이자, 픽사 내 ‘브레인 트러스트(픽사의 모든 영화에 관여하는 고위 창작자 그룹)’의 핵심 존재다. ‘토이 스토리’ 전체 시리즈의 각본에도 참여한 그는 5편에서 디즈니/픽사 충성 팬덤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최신형 스마트기기를 등장시켜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 ‘밤비’(1942)를 오마주하고, 시리즈 전작의 음악을 도맡은 작곡가 랜디 뉴먼을 복귀시켜 친숙한 멜로디를 선보였다. 스탠튼 감독이 지난 4월 미국 매체 엔터테인먼트위클리(EW) 인터뷰에서 “장난감 생애주기에서 보이는 요소들로 2달 정도 머리를 맞대면 속편 2편 분량의 소재는 나올 것”이라 발언한 내용이 재조명되며 6, 7편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모처럼 ‘토이 스토리 5’의 A+ 흥행 성적표를 받아든 픽사는 마냥 웃기 힘든 상황이다. 2017년 오리지널 각본작 ‘코코’가 전세계 8억2200만달러 흥행 수입을 기록하며 2편 제작에 착수한 이후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탄생시키지 못하고
기존 속편의 속편 제작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5'의 주인공 버즈(왼쪽부터)와 우디. 카우보이 인형 우디의 벗겨진 머리에 웃음 지은 관객 중 상당수는 배우 톰 행크스가 1995년 1편에서 우디의 목소리를 세상에 선보이기 직전 개봉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를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사진 월트디즈니 코리아]
픽사는 1986년 애플 창립자 스티브 잡스가 조지 루카스 감독에게서 컴퓨터그래픽 부서를 인수하며 창립한 이래 할리우드를 선도해왔다. 업계에선 픽사의 결정적 위기는
2018년 CCO(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존 래시터가 미투 사태로 사퇴하면서 촉발됐다고 본다. 그와 함께 픽사의 공동 창립자였던 에드 캣멀, ‘코코’의 감독 리 언크리치 감독, ‘인크레더블’ ‘라따뚜이’(2007)의 브래드 버드 감독 등 핵심 인재도 잇따라 스튜디오를 떠났다. ‘업’ ‘인사이드 아웃’(2015)의 피트 닥터 감독이 새 CCO로 취임해 앤드류 스탠튼과 픽사를 운영해왔다.
3D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선도한 '토이 스토리' 1편(1995)은 전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사진 월트디즈니커퍼니 코리아
이후 ‘굿 다이노’(2015) ‘엘리멘탈’(2023)의 한국계 피터 손, ‘메이의 새빨간 거짓말’ ‘엘리오’의 중국계 도미 시 등이 차세대 감독에 꼽혔지만, 흥행에선 큰 재미를 못 봤다. 이후 피트 닥터는
과거 픽사가 중시해온 개인적 서사 대신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작품으로 기획 방향을 전환했다.
2024년 “픽사 영화는 감독 자신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블룸버그)고 발언했던
피트 닥터는 올 3월
‘엘리오’에서 동성애자 암시 장면을 삭제 조치한 데 대해
“우리는 수억 달러짜리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아니다”(월스트리트저널)라고 한층 강한 발언을 쏟아냈다. ‘엘리오’에선 ‘왕따’인 주인공이 분홍 자전거를 타는 장면, 좋아하는 남성과의 삶을 상상하는 장면 등이 편집됐다. 이 일로 원래 감독이던 에이드리언 몰리나가 하차하고 매들린 샤라피안, 도미 시가 대타로 공동 연출을 맡았다.
픽사 CCO 피트 닥터 감독이 지난 6월 9일 미국 LA에서 열린 '토이 스토리 5' 프리미어 행사에 참석했다. 2024년 감독들의 자전적 경험이 기반 된 작품들이 연달아 대중적으로 실패하자 그는 “픽사 영화는 감독 자신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같은 해 자신의 연출작 ‘인사이드 아웃2’으로 역대 픽사 최고 흥행(전세계 16억 달러)을 거뒀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에 픽사 내부에도 반발하는 직원들이 나왔다. 이런 갈등은 지난해 디즈니+에서 공개된 픽사 오리지널 시리즈 ‘모두의 리그: 이기거나 지거나’에 있던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최종 삭제 결정하면서 더욱 심화해온 걸로 알려졌다.
이런 분열의 배경에 모회사 디즈니의 보수적 관리 지침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올해로 102살 된 콘텐트 공룡 디즈니는 2006년 파트너십 관계에 있던 픽사를 인수했다. 올 4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픽사의 미래를 다룬 기사에서
픽사가 3년간 개발해온 여성 서사 중심의 오리지널 기획 ‘베프(Be Fri, 절친을 뜻하는 단어의 줄임말)’가 디즈니의 대대적인 재작업 요구 이후 2023년 폐기됐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시기가 ‘토이 스토리’ 프리퀄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2022)가 동성 키스 장면을 두고 논란을 일으키며 흥행에 실패한 지 몇 달 뒤였다고 전했다. 이어 2024년 픽사는 디즈니의 비용 절감 전략에 따라 전 직원의 14%에 달하는 175명을 감원하는 사상 최대 규모 구조 조정도 단행했다.
브래드 버드 감독이 픽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라따뚜이'(2007)는 프랑스 식당에서 남몰래 요리를 즐기는 천재 요리 쥐 '레미'를 등장시켜 전세계 6억 달러 흥행수입을 거뒀다. 2022년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패러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WSJ 기사 말미에
피트 닥터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무언가를 만들다가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그 결과물이 속편이냐며 진정성을 의심하는 비판도 들려온다. 픽사가 밝힌 차기 라인업에는 도미 시 감독의 뮤지컬 애니메이션, 고양이 애니메이션 ‘가토’ 등 오리지널 기획도 있지만,
‘인크레더블 3’(2028, 이하 개봉 목표) ‘코코 2’(2029) ‘몬스터 주식회사’ 3편(미정) 등 속편 비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브래드 버드 감독은 최근 미국 매체 데드라인 인터뷰에서 “픽사가 ‘라따뚜이’ 속편을 수차례 제안했지만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거절해왔다”고 말했다.
픽사는 속편에 기대어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할리우드 상상력의 최전방에 섰던 픽사가 스튜디오의 미래를 건 중요한 갈림길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