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원) 내에서 취재진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과 이란이 지난달 17일 체결한 ‘60일 휴전 체제’가 사실상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이란이 11일(현지시간) ‘호르무즈해협 폐쇄’ 선언이라는 초강수를 꺼내 들자 미국이 대대적인 공습에 들어가고 이란 역시 곧바로 반격에 나서면서다. 강대강 충돌 속에 중동 정세가 종전 양해각서(MOU) 체결 이전 상태로 회귀하면서 최종적인 평화 합의 도출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이날 성명을 통해 “외세의 간섭과 호르무즈해협 항로의 불법적 지정에 대해 단호히 대응하고 통항량 증가 흐름이 차질을 빚을 거라고 사전에 발표했는데도 불과 몇 시간 전 이런 경고가 무시됐고, 외세의 선동으로 여러 선박이 승인되지 않은 항로로 통항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외세’는 사실상 미국을 겨냥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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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추후 공지까지 호르무즈 전면 봉쇄”
혁명수비대는 이어 “이들 선박에 항로를 수정해 승인된 항로로 지나가도록 경고했지만 무시했다”며 “외세의 불법 개입으로 인한 불안정이 발생했으므로 호르무즈해협은 추후 공지 때까지, 역내 미국 개입이 종료될 때까지 전면 봉쇄한다”고 했다.
지난달 17일 미·이란 양측이 60일간 휴전에 들어가는 즉시 호르무즈해협을 재개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종전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이후 24일 만의 ‘해협 재봉쇄’다. 혁명수비대는 또 미승인 항로를 지나려던 선박 1척에 대해 “선박 시스템을 끄고 해상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 경고사격을 가해 멈춰 세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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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3차 공습 개시…약 140개 표적 타격”
미국은 ‘호르무즈해협 상선 피격’ 책임을 물어 즉각 공습에 나섰다. 중동 지역을 관할하는 미 중부사령부는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미 동부 시간 기준 오후 7시 15분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던 키프로스 선적 컨테이너선 ‘M/V GFS갤럭시’호를 노골적으로 공격했다”며 “이에 중부사령부가 이번 주 세 번째 공습을 개시했다”고 밝혔다. 이란이 ‘해협 재봉쇄’를 선언한 지 약 두 시간 만의 폭격이다.
중동 지역을 관할하는 미군 중부사령부가 지난 9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게시한 영상 속 한 장면. 미군의 공습으로 이란 군사 목표물이 폭발하는 모습이 잡혔다. AFP-=연합뉴스
중부사령부는 이란의 공격으로 민간 선원 1명이 실종됐고 선내 화재와 기관실의 심각한 손상으로 갤럭시호는 항해를 계속할 수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중부사령부는 “미군은 육상 및 해상 전투기, 무인기, 해군 함정에서 발사한 정밀유도 무기를 통해 약 140개의 이란군 표적을 타격했다”며 “표적에는 이란의 미사일·무인기 기지, 해군 시설, 탄약 저장시설, 통신망, 해안 감시 기지 등이 포함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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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그세스 장관 “이란, 대가 치를 것”
이어 “이번 공습은 최고사령관(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이번 주 사흘 밤에 걸친 공습을 통해 이란의 300개 이상 표적을 타격했다”고 전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전쟁부) 장관도 X를 통해 “이란이 형편없는 선택을 했다. 이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공습 이후 호르무즈해협의 케슘섬과 반다르아바스·시리크를 비롯해 이란 최대 정유 시설이 있는 아살루예, 유일한 상업용 원전이 있는 부셰르 등 이란 남부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고 현지 매체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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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반격…“중동 내 미군 시설 공격”
이란도 곧장 반격에 나섰다. 이란 국영 TV는 “이란 정규군이 이란 혁명수비대와 함께 요르단, 쿠웨이트, 바레인의 미군 시설을 공습했다”고 보도했다.
이란군은 카타르 알우데이드 공군기지를 겨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으며, 혁명수비대는 요르단의 프린스 하산 공군기지에 주둔한 미군 지휘통제소와 MQ-9 드론 격납고를 탄도미사일로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또 드론을 이용해 쿠웨이트 주둔 미군 기지의 패트리엇 방공 포대와 탄약고, 레이더 시설을 공격했고, 바레인의 미 해군 5함대 사령부도 공격했다고 밝혔다. 아크라미 니아 이란군 대변인은 “이란군은 호르무즈해협에 대한 이란 국민의 주권을 확고하게 지킬 것”이라며 “우리의 표적 목록은 계속 갱신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란 정부를 대표해 대미 협상을 이끌어 온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일방적인 합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이어 미국을 향해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위협했다.
11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 한 광장에서 열린 전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추모 집회에서 친정부 시위대가 반(反)트럼프 피켓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날 이란의 해협 재봉쇄→미국의 3차 공습→이란의 반격은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휴전 종료’를 사실상 공식화한 지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란 우리에게 ‘대화’를 계속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우리는 이에 동의했지만 미국은 이란에 휴전이 끝났다고 단호하게 밝혔다”고 알렸다. 종전 합의의 ‘종료’를 의미하는 단어 ‘오버(OVER)’를 영어 대문자로 표기하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미사일 1000발이 이란을 겨냥해 장전돼 있으며 이란 정부가 공언한 위협대로 현직 미국 대통령, 즉 나를 암살하거나 암살을 시도할 경우 수천 발의 미사일이 추가로 즉시 발사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미군은 1년간, 그리고 연장 가능한 기간 동안 이란 전역을 완전히 몰살하고 파괴할 준비와 의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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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휴전 종료” 공식화…이란 “복수” 다짐
미국은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에서 감행한 상선 공격을 MOU 위반이라고 판단하고 지난 7일과 8일 연이틀 이란 군사시설물을 집중 공격했으며, 이란산 원유 제재를 복원시켰다. 또 이란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포함해 정권 엘리트의 글로벌 자금 조달망으로 지목된 조력자 알리 안사리와 이란 은행들을 대신해 불법 금융 활동을 벌여온 이란 환전소 3곳 등에 대한 추가 제재도 10일 발표했다.
이란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며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부친인 아야톨라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장례식 관련 서면 메시지를 11일 내고 “우리는 흉악하고 수치스러운 살인자들로부터 당신과 이 두 차례 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순교자의 순결한 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고 밝혔다.
미국과 이란 간 충돌의 출발점은 MOU 제5항을 둘러싼 입장차다. 이 조항은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의 안전한 항행을 보장하고 기뢰 제거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한편 오만 등 연안국들과 향후 관리 방안을 협의하도록 규정했다. 미국은 이를 국제 상선의 자유로운 항행을 보장하는 조항으로 해석하는 반면 이란은 자국의 배타적 해협 관리 권한을 인정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란은 이날 오만과 MOU 제5항에 따른 호르무즈해협 안전 통항 보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CNN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오만 외교부는 해협을 남북 2개의 항로로 분리해 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즉 오만 영해를 지나는 남부 항로는 과거와 같이 자유 항행을 보장하고, 이란 영해를 지나는 북부 항로는 이란의 사전 승인을 받아 운항하되 별도 통행료는 포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란 내 강경파인 혁명수비대가 이날 ‘추후 공지 때까지 해협 재봉쇄’를 선언하면서 오만의 제안을 사실상 일축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미 중부사령부는 12일 X에서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이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며 “미군은 이란의 위협이나 자의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항행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란이 민간 선박을 공격하면 미군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부사령부는 또한 “지난 두 달 동안 미군이 800척 이상의 선박과 4억 배럴 이상의 원유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도록 지원했으며, 지난 1주일 동안은 140척 이상이 해협을 통과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같은 날 미 NBC 방송 ‘밋 더 프레스’ 인터뷰에서 ‘호르무즈해협이 개방됐냐’는 질문에 “모든 상선에 열려 있다”고 답하면서 이란의 통제권을 부인했다. 그는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개방과 비핵화 등에 합의하고 협상장을 떠난 뒤 선박에 드론 공격을 가했다”며 “매우 사악하고 병든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난 밤 이란을 매우 세게 폭격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측에서 잇따라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통제권을 부인하고 나선 것은 이란 측의 앞선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취지다. 이란 메흐르통신에 따르면 페르시아만 해협 관리청(PGSA)은 이날 X에서 “최근 미군이 이 지역에서 불법적인 활동을 벌인 관계로 호르무즈해협 통행이 현재 불가능하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