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김현철의 퍼스펙티브] 모두에게 모든 것을 증명하라니, 그 돈은 누가 냅니까

중앙일보

2026.07.13 08:16 2026.07.13 13:38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한국에선 증명서 요구가 왜 이렇게 많을까
김현철 연세대 의대 교수·인구와인재연구원장

김현철 연세대 의대 교수·인구와인재연구원장

미국 대학 교수로 지내던 시절, 여름 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침 공저자가 있는 국내 한 대학이 나를 석 달간 객원 연구원으로 초청했다. 나를 초청한 교수는 웃으며 “각오하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교직원이 보내온 이메일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무급으로 석 달 머무는 방문연구자에게 제출하라는 서류가 열두 가지였다. 성범죄 경력조회 동의서를 요구했고 인권·성평등 교육도 받아야 했다. 홍콩과 미국에서 교수로 임용될 때, 이력서와 추천서면 충분했던 경우와 대비되었다. 항의해 보아야 곤란해지는 것은 규정을 따랐을 뿐인 일선 교직원이다. 나는 그냥 방문을 포기했다.

증명하는 데 천문학적 거래비용 들어가
신뢰자본 부족한 한국의 웃픈 현실 절감
위험 큰 경우만 골라 정밀하게 검증하고
행정정보 중복 요구 말고 일몰제 도입을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국에 돌아오니 이런 일이 일상이 됐다. 한 정부 부처가 발주한 두 시간짜리 강의 하나에 재직증명서, 4대보험 가입증명서, 학위증, 관련 이력의 증명까지 내라고 요청 받았다. 강의를 거절했다. 결국 나는 이런 일을 처리할 행정원을 따로 고용했다. 웃픈 일이다. 나처럼 비용을 외주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낫다. 서류 한 장을 떼러 반나절 일을 접어야 하는 사람이 진짜 피해자다. 증명의 부담은 약자에게 더 무겁다.

‘증명하라’ 요구는 공짜가 아니다
증명서를 요구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사기꾼이 가짜 학위로 강의하거나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도 있으니 필요한 게 아니냐고. 하지만 그 확인에 드는 비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경제학은 이를 ‘거래비용’이라 부른다. 증명서 한장을 누군가는 발급하고, 누군가는 검토하고, 누군가는 보관한다. 전국에서 매일 수십만 건씩 쌓이는 이 비용은 어느 장부에도 잡히지 않는다. 불신이 만든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이런 부담은 사회 전반에 만연하다. 개발경제학자인 나는 에티오피아에서 연구 사업을 했다. 한국의 한 원조기관은 현지에서 발생한 모든 영수증을 스캔하고, 원본을 한국으로 보내라 했다. 스캔 작업만 전담할 직원을 따로 고용해야 했다. 먼 나라의 이웃을 도우러 온 젊은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회계 서류와 씨름하며 보냈다. 얼마 뒤 종이 영수증이 가득 쌓였다. 이걸 한국으로 부치자 인천공항 세관에 걸렸다. 영수증만 가득한 상자 스무 개가 세관의 눈에 수상해 보였던 것이다.

일상에도 증명은 계속된다. 지난 겨울 아이들과 시립 눈썰매장에 갔다. 다둥이 할인을 받으려 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단다. 정부가 발급한 다둥이 카드를 내밀었는데도 말이다. 이유가 짐작되는가? 카드 한 장으로 남의 아이까지 데려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잡겠다고 모든 이용객을 의심한다. 우리는 시민을 일단 의심하고, 결백의 증명을 의심받는 쪽에 떠넘긴다. 이것이 불신 사회의 기본 법칙이다.

촘촘한 증명이 정작 나쁜 사람을 완벽히 걸러주지도 못한다. 보조금 전문 사기꾼은 이 복잡한 그물망을 오히려 쉽게 빠져나가곤 한다. 정작 촘촘한 규제에 걸려 넘어지고 팍팍한 검증의 짐을 지는 것은 대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다.

이 모든 그물을 짠 것은 악인이 아니다. 선한 의도도 설계가 정교하지 못하면 시민을 옭아맨다. 김영란법이 그렇다. 부패의 고리를 끊겠다는 선한 의도는 우리 사회의 오랜 접대 문화를 줄이고 공직과 학계를 투명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도 낳았다. 하지만 지나친 규제가 낳은 부작용도 심각하다. 강연과 기고, 자문과 토론까지 신고와 상한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지식 교류의 상당 부분이 행정 절차에 묶이게 되었다. 부패를 막는 규칙 때문에 모든 지식 활동이 행정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인프라
서로를 믿는 사회는 무엇을 얻나? 경제학자들은 신뢰를 도덕이 아니라 자본으로 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모든 거래비용이 치솟는 사회의 인프라다.

한 연구는 여러 나라의 신뢰 수준과 성장률을 비교했다.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10%포인트 높은 나라는 연간 성장률이 약 0.8%포인트 높았다(Knack & Keefer, 1997). 상관관계일 뿐이고 표본도 29개국에 그치는 약점이 있으나, 신뢰와 번영이 나란히 간다는 사실은 이후 연구에서 거듭 확인됐다.

그렇다고 모든 서류를 없애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꼭 필요한 서류를 쓰지 않아 낭패를 봤다. 나는 한국에 와서 한동안 조교와는 변변한 계약서 없이 일했다. 그러던 중 한 조교가 강의용 슬라이드 제작은 본인 일이 아니라며 업무를 거절해서 당황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자연과학과 공대는 이미 교수와 조교 사이에 명시적 계약서를 쓰고 있었다.

계약서는 서로의 기대를 맞추고 갈등을 예방하는 장치다. 행동경제학의 계약 실험들은 계약과 보상 설계가 공정성의 신호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정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낄 때 더 높은 노력을 기울인다(Fehr et al., 2007). 잘 준비된 계약서는 갈등을 미리 막고 각자 제 역할에 집중하게 하는 보호막이다.

이렇듯 같은 서류라도 방향이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각종 증명서는 과거에 대한 의심이고, 계약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인 셈이다. 규제 당국이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요청하는 서류가 불신을 전제하는가, 신뢰를 설계하는가이다.

처방: 의심의 비용을 설계로 줄이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모두에게 같은 증명을 요구하지 말고 위험이 큰 경우만 정밀하게 검증해야 한다. 시민의 생명이나 대규모 국가 예산이 걸린 영역은 사전에 검증하되, 일상적인 행정이나 소규모 용역은 사후 제재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정부가 이미 가진 정보는 다시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행정정보 공동이용 제도가 있는데도 창구는 여전히 시민에게 서류를 떼어 오라 한다. 부처가 가진 데이터를 스스로 조회하면 끝날 일이다.

셋째, 일몰제다. 한번 만든 절차도 주기적으로 효과를 따져 걷어 낸다. 무엇을 걸러 냈고 무엇을 놓쳤는지 묻지 않으면 규제는 관성으로 쌓인다.

좋은 의사는 환자에게 검사를 거듭하지 않는다. 검사 하나하나가 비용이고 고통이다. 꼭 필요한 검사만 골라 진단하는 의사가 진짜 실력자다. 좋은 국가도 그렇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증명하라는 나라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만 정밀하게 검증하고 나머지는 시민을 믿는 나라다. 사회적 신뢰가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키우는 최선의 처방이다.

김현철 연세대 의대 교수·인구와인재연구원장

※참고문헌=Knack, Stephen, and Philip Keefer. “Does Social Capital Have an Economic Payoff? A Cross-Country Investigation.”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112.4 (1997): 1251-1288.

Fehr, Ernst, Alexander Klein, and Klaus M. Schmidt. “Fairness and contract design.” Econometrica 75.1 (2007): 121-154.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