끙끙 앓는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작년에 신경치료를 받았던 남편의 어금니가 또다시 말썽을 부린다. 며칠째 이어지는 치통에 담당 의사에게 연락했지만, 예약은 보름 뒤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진통제로 버티겠다는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통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급한 대로 인근 치과를 찾던 중 남편의 사업장 단골이 한 곳을 추천해 주었다.
‘미아리 치과’, 이국땅에서 오래전 기억 속 지명을 만난 듯 반가웠다. 남편의 직장과도 멀지 않아 망설일 것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상호는 보이지 않고 ‘G치과’ 라는 간판만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헤매다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미아리 치과가 있나요?”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는 우리 치과밖에 없는데 혹시 저희 선생님을 찾으시는 건가요?”
그제야 출입문 한쪽에 붙은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DR. MIA LEE.’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웃고 말았다.
살다 보면 같은 말을 나누고도 서로 전혀 다르게 이해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지인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아들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도와주던 남편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결국 아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숙제를 왜 항상 마감 직전에 몰아서 하냐? 아빠는 그 나이 때 뭐든 혼자 계획해서 다 끝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어.”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이 서툰 한국말로 대답했다. “잘났어 아빠. 진짜 대단해.”
순간 남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라고? 넌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남편은 그것을 비꼼으로 받아들였고, 이유도 모른 채 혼이 난 아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아들은 단지 감탄이 스친 짧은 표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말을 듣고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비친 자신의 기억을 먼저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방식대로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미아리 치과’도 그랬다. 익숙한 이름 하나를 마음속에 새겨 둔 채, 그 틀 안에서만 간판을 찾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오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모습으로 먼저 바라본다. 굳어진 확신은 때로 눈앞의 진심보다 마음속 기억을 먼저 믿게 한다.
이해란 결국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 안의 확신을 잠시 내려놓을 때, 타인의 진심은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세계는 생각보다 좁고, 이해라고 여겼던 것들 역시 한 조각의 시선에 불과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