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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거지 행색

Los Angeles

2026.07.15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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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 수필가

이정아 수필가

선배님 부부는 복수국적을 취득해 일 년의 절반은 한국에서, 나머지는 미국에서 사신다. 아드님들 보러 미국에 오시면 딱히 할 일이 없어 재미가 없다고 바깥 선생님이 불평이 많으시단다. 이 선배님의 부군 B사장님은 한국 방송사의 미국법인 사장님이셨다. 심심하면 옛날 회사 부근을 산책하곤 하신다. 어느 날 윌셔 길에서 한인 아주머니가 돈을 주셨단다. 10달러짜리 지폐를 주며 불쌍히 쳐다보시더니 식삿값이라 하곤 황급히 가셨단다. 거절할 새도 없이, 홈리스가 아니라고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팔순을 훌쩍 넘기신 수필가 K선생님은 스타벅스 모카 병 커피 애호가시다. 하루는 세븐일레븐에 커피를 사러 갔더니 점잖게 생긴 백인 남자가 “미안합니다. 이것밖에 수중에 없어서…” 하며 돈을 주더란다. 받고 보니 4달러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늘 보던 편의점 알바생이 10달러를 내밀며 제발 받으라고 하기에 받아왔노라 하신다. K선생님은 요즘 허리통증으로 고생 중이시고 허리가 많이 굽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선생, 거지가 아니어도 남들 눈엔 내가 거지로 보이나 봅니다. 하늘 갈 나이 되어서 다 비우는 중이니 거지가 맞지만, 적선을 받고 나니 참 씁쓸하네요” 하신다.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도 선생님을 뒤따라가는 형국이어서 머지않은 때의 나의 모습일 것이다.
 
이번에 시댁 조카의 결혼식 참석차 한국에 갔었다. 만나고 싶은 분들은 내가 있는 분당으로 오셨다. 다리는 부실하고 총체적 난국인 내 건강 상태를 고려한 배려였다. 덕분에 여고동창들과 교회 오라버니들, 남동생들, 내 형편을 아는 오랜 친구들이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반가운 대면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만나러 오면서 온갖 텃밭 푸성귀에, 맛난 빵, 좋은 책, 볶은 깨, 부엌행주, 화장품, 양산, 숄, 스웨터, 머그컵, 꽃, 떡, 보이차, 홍삼 진액에 작품가방, 건강용품, 조선 팔도 유명 먹거리까지 바리바리 많이도 싸 와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췌장암 완치 판정을 받은 친구는 기쁜 나머지 내게 용돈 봉투를 주기도 했다. 내가 축하금을 줘도 모자랄 판에. 이번 나간 김에 일곱 번째 수필집을 낸 내게, 작품 해설을 써주신 나태주 선생님도 여비라며 큰돈을 주셨다.
 
한국에서 받은 많은 사랑과 베풂을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 사람들은 본래 남과 나누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 집만 해도 텃밭 채소나 과일은 우리 몫보다 남을 주는 게 더 많지 않은가 말이다. 어려운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도 어딘가에 숨겨놓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번에 선물 받은 네발 지팡이를 짚고 윌셔 거리로 한번 나가볼까나?

이정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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