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 깊이 한국인,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잡종(雜種)인 나는 올해 초여름 한국에서 있었던 몇 행사에 참여하였다. 고교 졸업 60주년 재상봉, 한국어진흥재단과 MOU 관계인 숙명여대 창학 120주년 행사, 모교 이화여대 창학 140주년 행사, 조선 말 차별받던 여인들을 구제하고 돕기 위해 선교사들이 세우고 고종황제가 이름을 하사한 ‘보구녀관(保救女館)’의 후예인 이화여대 의과대학 부속 병원 방문 등이었다. 행사가 비어 있는 며칠 동안은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 전시관과 타이완을 다녀왔다.
박수근의 작품들은 박수근 전시관 이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리움에서 관람할 수 있지만, 그가 출생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강원도 양구에 가보고 싶었다. 박수근의 소박한 표현, 단순한 듯 보이는,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판화를 남편도, 나도 좋아한다.
담배 피우는 남정네들의 뒷모습을 그린 그의 판화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무엇을 보려고 돌아앉아 있었나. 담배를 피우려면 돌아앉아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 남정네들이 나의 아버지, 아저씨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국에서 반세기 이상을 살아온 우리가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양구로 가는 것은 쉬울 것 같지 않아 많이 염려되었다. 편히 택시를 타도 되었을 터이지만, 왠지 박수근 전시관은 양구·경기도·강원도·5월의 녹음을 동반하므로 우리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챗지피티는 가고 오는 길과 지하철 출입구 정보뿐 아니라 버스 일정표 등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또 양구에는 박수근 전시관 이외에도 양구 특산물인 시래기 전문 맛집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양구에 도착해 맛집에서 시래기 정식을 먹었다. 시래기가 정식 메뉴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해 보기도 했다.
비를 맞고 있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산과 들은 진녹색으로 건강하고, 풍요롭고, 고즈넉해 보였다. 보슬비는 양구에 도착한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젊은 시절 데이트하던 때처럼, 비를 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일회용 우산 하나를 쓰고, 천천히 소양강변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 이외에는 걷는 사람도, 차를 타고 가는 사람도, 전시관을 향해 가는 사람도 없었다. 전시장으로 가는 입구에는 양구를 대표하는 사람, 박수근의 동상이 서 있다. 왼손에는 스케치북, 오른손에는 연필을 들고 고개를 숙여 사색하는 모습이다.
보슬비·정적·인기척 없는 길·고요한 세상, 회색빛 날씨와 잘 어울리는 박수근의 판화들. ‘해가 쨍쨍 나는 날에는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다가올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 그의 판화들은 직선과 직선을 연결해 과일 파는 여인네들을 만들었고, 벌거벗은 나무를 광야에 세우고 있었다. 쪽진 여인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들, 그네들은 모두 흰색의 한복 차림이었다. 옷의 선이 빳빳해 보여서 광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 말을 붙이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가난에 대한 성찰과 민족적 표현은 존엄했다.
박수근 하면, 왠지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게 된다. 두 화가의 그림과 삶의 방식, 그리고 살았던 곳과 시기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작품을 좋아하고, 두 사람 모두 생전 가난했기에 나는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박수근도 빈센트 반 고흐도 밀레를 좋아했다는 것이겠다.
빈센트는 생전에 겨우 한 점의 그림만 판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400프랑 정도 받았다고 추정한다. 그가 남긴 2100여 점의 작품 중에는 유화가 860여 점이고 나머지는 스케치, 드로잉 등이라 한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많은 빈센트 작품을 나치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그 작품들은 등록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생전 한 점의 그림만 팔렸던 빈센트는 가난과 정신병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그의 사후 100년 만에 8250만 달러에 팔린 작품(Dr. Gachet 초상화)도 있다. 세상이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그림 세계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이러니하다.
박수근도 빈센트처럼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 이후, 미군 부대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미군과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이로 인해 그의 작품들이 미국에 전해지기도 했다. 미국인 후원자들이 가난한 그에게 미술용품 등을 사주고, 그림도 판매해 주며 그를 도왔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마거릿 밀러 부인이다.
박수근의 작품들은 1960년대 미국에서 30~100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400여 점의 드로잉, 삽화, 판화, 초상화 중에 250여 점이 유화라고 한다. 그는 여러 번 미술전에 입상한 바 있다. 그의 그림 중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한참 후에, 45억 2000만 원에 판매된 것도 있다는 소식이다. 이 역시, 그의 가난했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현재 활동하는 화가들뿐 아니라 문인들, 음악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적절한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고,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