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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우강보다 오래 남은 한 그릇의 기억

Los Angeles

2026.07.1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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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식탁 위에 세계를 담다 ③
굴라쉬로 읽는 헝가리 여행

헝가리를 대표하는 국민음식 '굴라쉬'
부다페스트를 가장 깊게 기억하는 방법
도나우강과 부다페스트 야경을 배경으로 차려진 헝가리 전통 음식 굴라쉬.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이 여행의 온기를 더한다.

도나우강과 부다페스트 야경을 배경으로 차려진 헝가리 전통 음식 굴라쉬.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이 여행의 온기를 더한다.

지난 5월 동유럽과 발칸 6개국을 지나며 수많은 풍경을 만났다. 프라하의 골목은 오래된 돌길 위에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거리는 화려하기보다 차분한 일상의 표정을 보여줬다. 플리트비체의 물빛은 숲의 숨결처럼 맑았고, 블레드 호수는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고요했다. 여행지마다 저마다의 색과 온도가 있었지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도시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였다.
 
많은 이들이 부다페스트를 야경의 도시로 기억한다. 실제로 도나우강을 따라 이어지는 불빛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언덕의 부다와 평지의 페스트가 마주 보는 모습은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부다 쪽에는 왕궁 언덕과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가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고, 페스트 쪽에는 국회의사당과 성 이슈트반 성당, 넓은 거리와 카페가 오늘의 활기를 채운다.
 
어부의 요새에 올라 바라본 도나우강은 낮과 밤이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줬다. 낮에는 강 건너 국회의사당의 정교한 건축미가 또렷했고, 해가 지자 건물 전체가 황금빛 조명을 입고 강물 위에 길게 비쳤다. 세체니 다리와 유람선의 불빛까지 더해지면 도시는 한순간 거대한 무대처럼 변했다. 사진으로 남기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장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기억은 눈앞의 풍경보다 한 그릇의 국물에서 더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야경보다 깊은 한 그릇
 
여행은 걷는 시간의 연속이다. 낯선 거리와 광장, 계단과 골목을 지나고, 강변의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보낸 뒤에는 몸이 먼저 따뜻한 음식을 찾는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굴라쉬는 바로 그 순간의 허기를 다독여 준 음식이었다.
 
굴라쉬는 헝가리어로 '구야시(Gulys)'라 불린다. 본래 소를 돌보던 목동을 뜻하는 말에서 시작됐다. 헝가리 대평원을 오가던 목동들이 야외에서 솥을 걸고 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여 먹던 음식이 오늘날 굴라쉬의 뿌리다. 그래서 굴라쉬에는 화려한 궁정 요리의 분위기보다 들판의 바람과 사람들의 생활이 더 짙게 배어 있다.
 
헝가리 대평원에서 목동들이 솥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여 먹던 굴라쉬의 기원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헝가리 대평원에서 목동들이 솥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여 먹던 굴라쉬의 기원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들판에서 태어난 국민음식
 
현지에서 맛본 굴라쉬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걸쭉한 스튜와는 조금 달랐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국물 요리에 가까웠다. 오래 끓인 소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가 부드럽게 어우러지고, 그 위로 헝가리 음식의 상징인 파프리카 향이 천천히 올라왔다. 첫맛은 따뜻했고, 뒤이어 은은한 단맛과 깊은 향이 남았다. 맵다는 표현보다는 부드럽고 깊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한 나라의 음식은 단지 맛의 문제가 아니다. 땅에서 나는 재료와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노동, 계절을 견뎌낸 방식이 함께 스며든다. 굴라쉬가 목동의 솥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 음식이 지금도 많은 이에게 편안한 식사가 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한국 사람에게 된장국이나 설렁탕이 주는 위로가 있듯, 굴라쉬도 낯선 도시에서 이상하게 친숙한 온기를 전했다. 멀리 떨어진 유럽의 음식이지만, 추운 날 몸을 데우고 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국물의 힘은 어디서나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굴라쉬를 먹는 동안에는 화려한 야경을 보았다는 감탄보다, 이 도시가 한결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다페스트 전통시장 그랜드마켓홀.

부다페스트 전통시장 그랜드마켓홀.

파프리카의 붉은 기억
 
부다페스트 중앙시장인 그레이트 마켓 홀에 들어서면 굴라쉬의 맛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시장 안에는 붉은 파프리카 가루와 말린 파프리카 다발, 각종 향신료와 현지 식재료가 가득하다. 관광객들은 이국적인 색채에 시선을 빼앗기고, 현지인들은 저녁 식탁을 위해 장을 본다. 박물관이 한 나라의 과거를 보여준다면 시장은 그 나라의 오늘을 보여준다.
 
파프리카의 짙은 붉은색은 단지 기념품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헝가리 식탁의 기억과 생활의 색처럼 보였다. 굴라쉬의 핵심도 결국 파프리카다. 음식에 붉은빛을 입히는 것은 물론, 은은한 단맛과 향을 더하고 오래 끓였을 때 국물의 깊이를 완성한다. 양파를 볶고 고기를 익힌 뒤 파프리카를 더해 천천히 끓이는 과정에는 서두름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여행도 그렇다. 유명한 명소를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도시의 속살을 만나기 어렵다. 시장의 냄새를 맡고, 현지인이 찾는 식당에 앉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 그릇을 맛볼 때 비로소 여행은 내 기억이 된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눈으로 보는 헝가리였다. 반면 굴라쉬는 몸으로 기억하는 헝가리였다.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도나우강과 황금빛 국회의사당 야경.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도나우강과 황금빛 국회의사당 야경.

맛은 여행을 기억한다
 
차가운 강바람 끝에서 만난 국물의 온기, 중앙시장에서 맡은 파프리카 향, 오래 끓인 고기의 깊은 맛은 화려한 도시의 풍경을 사람 사는 기억으로 바꾸어 주었다. 좋은 여행은 몇 곳의 명소를 보았는가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곳의 음식을 맛보고, 그 음식이 태어난 배경을 알고, 현장의 풍경과 함께 기억할 때 여행은 훨씬 깊어진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굴라쉬 한 그릇에는 도나우강의 야경과 시장의 붉은색, 골목의 바람과 헝가리 사람들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마음을 데우는 기억은 대개 그렇게, 한 장의 사진보다 한 숟가락의 맛으로 오래 남는다. 그 기억은 또 한 번 여행을 부른다.
 
▶문의 : 213-739-2222, www.prttour.com

박태준 이사
 
푸른투어 서부본부의 박태준 이사는 25년째 여행 현장을 누비며 가이드, 해외 인솔자, 상품 기획자, 여행컨설턴트로 활동해온 여행 전문가다. 다년간의 현장 경험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고객 맞춤형 여행은 물론 미국 전역과 해외를 아우르는 고품격 여행 서비스를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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