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한 곳의 스테이크하우스를 찾아 그 집만의 고기 철학과 조리 방식, 공간의 결을 차분히 기록하는 〈스테이크의 정석〉을 시작합니다. 스테이크 전문가 김광중 셰프가 화제성보다 완성도에 주목해 스테이크 한 접시에 담긴 디테일을 짚어봅니다. 5회는 ‘파블로 그릴 앤 바’입니다.
⑤ 파블로 그릴 앤 바
통창을 따라 배치한 창가석과 대형 와인 셀러가 어우러진 파블로의 내부 전경. 광화문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사진 김광중
오랜 전통을 가진 호텔이 리뉴얼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쌓아온 미식 브랜드와 헤리티지는 어디로 향할까요. 시청 앞 더 플라자의 리뉴얼을 앞두고 한화푸드테크는 호텔의 일부 다이닝 브랜드를 광화문 KT광화문빌딩 West 15층으로 옮겼습니다. '더 플라자 다이닝'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브랜드를 선보였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곳이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 '파블로 그릴 앤 바(이하 파블로)'였습니다. 최근 국내에도 프리미엄 스테이크하우스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만큼, 파블로가 어떤 차별점을 보여줄지 궁금해서, 다녀왔습니다.
파블로를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의외로 음식보다 '뷰'입니다. 15층 높이의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경복궁과 북악산, 청와대, 그리고 광화문광장의 파노라마는 이 공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기존 호텔 다이닝이 차분하고 클래식한 분위기에 집중했다면, 파블로는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개방감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음식보다 뷰가 먼저 기억난다"는 후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5층 통창 너머로 광화문과 북악산이 펼쳐지는 창가석. 파블로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사진 김광중
레스토랑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평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공간이 주는 첫인상이 특별한 식사의 기억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강점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창가를 향해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분위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파블로는 '불(Fire)'과 '숙성(Aging)'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효율성과 화제성이 강조되는 최근 외식 트렌드 속에서 파블로는 오히려 손이 많이 가는 정통 조리 방식과 숙성 기술에 집중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다양한 그릴 장비와 숯, 분주하게 움직이는 셰프들의 모습, 숙성 중인 원육을 보며 '스테이크를 꽤 진지하게 다루는 곳이구나'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집에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스테이크 콘텐츠가 많지만, 파블로는 전문 장비와 숙성 시스템, 다양한 화력 장비를 통해 레스토랑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보여주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스테이크와 함께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사진 김광중
정통 스테이크하우스의 또 다른 축인 시푸드 메뉴 역시 한국인의 취향을 고려해 구성했습니다. 스테이크뿐 아니라 다양한 Surf & Turf 조합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체 에이징룸입니다. 스테이크를 핵심으로 하는 브랜드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고객은 자신이 먹게 될 원육의 숙성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숙성 과정을 눈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스테이크하우스의 전문성을 전달하는 요소처럼 느껴졌습니다.
입구에 마련된 그릴과 숙성고는 스테이크에 대한 브랜드의 전문성을 보여준다. 사진 김광중
대표 메뉴인 '28 Days Dry-Aged In-house Steak'는 단순한 메뉴명이 아닙니다. 28일 동안의 숙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율 손실과 엄격한 온·습도 관리, 숙성 후 트리밍 과정까지 감수하며 숙성을 브랜드의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완성된 스테이크는 강한 화력으로 크러스트를 잘 형성했고, 내부는 육즙을 유지하면서도 드라이에이징 특유의 풍미를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했습니다. 함께 제공되는 버터를 스테이크 위에 녹여 먹는 방식 역시 미국 정통 스테이크하우스의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재현했습니다. 식전빵이 제공되는 순간부터 샐러드, 메인 요리, 와인 서비스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의 식사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미국 정통 스테이크하우스의 조리 방식으로 굽고, 뜨거운 핫플레이트를 사용해 마지막 한 점까지 온기를 유지하며 즐길 수 있다. 사진 김광중
서비스에서도 호텔 다이닝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캐주얼 스테이크 브랜드와는 다른 여유와 디테일이 느껴졌고, 와인을 추천하거나 고객과 소통하는 작은 순간까지도 안정감 있게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입구에 자리한 약 1000종 규모의 와인 타워 역시 공간의 상징적인 요소 역할을 합니다. 수천만 원대 프리미엄 와인부터 스테이크와 페어링하기 좋은 다양한 리스트까지 갖춰 비즈니스 미팅이나 중요한 모임에도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미국 정통 스테이크하우스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파블로는 다양한 와인과 위스키를 갖추고 있다. 사진 김광중
전체적인 완성도는 높았지만 메뉴 구성은 다소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머무른다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여러 유명 스테이크하우스의 장점을 충실히 연구한 흔적은 보였지만, 반대로 말하면 파블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시그니처가 아직은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스테이크 자체의 완성도는 만족스러웠지만, 이곳만의 개성을 기억하게 만드는 메뉴는 조금 더 보완될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셰프만의 개성이 담긴 사이드 메뉴나 한국적인 재료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메뉴가 더해진다면, 광화문이라는 입지와도 잘 어우러지며 해외 고객들에게도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 숙성과 셰프의 조리 과정을 거쳐 완성한 스테이크. 선명한 크러스트와 풍부한 육즙이 특징이다. 사진 김광중
청와대와 광화문, 경복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서울의 풍경은 이미 충분한 경쟁력입니다. 이제 그 공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가 더해진다면 브랜드의 정체성은 한층 선명해질 것입니다.
1인당 14만~19만 원에 이르는 객단가는 방문 전부터 고객의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립니다. 그만큼 파블로가 상대해야 하는 고객은 이제 '흑백요리사'를 보며 미식 경험의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입니다. 공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 평가받는 것은 접시 위의 음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파블로 그릴 앤 바는 단순히 고기를 굽는 레스토랑을 넘어, 호텔의 서비스 헤리티지와 광화문이라는 상징적인 입지, 그리고 스테이크 다이닝을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낸 공간이었습니다. 국내 프리미엄 그릴 다이닝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흥미로운 사례이자, 충분히 벤치마킹할 만한 브랜드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망은 첫 방문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맛은 두 번째 방문의 이유가 됩니다. 이제 파블로가 증명해야 할 것은 후자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