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된 건물 옆을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5월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고층 건물을 타격해 최소 24명을 숨지게 한 러시아 Kh-101 순항미사일. 우크라이나군이 미사일 잔해를 조사한 결과 유도기능을 탑재한 일본산 컴퓨터 모듈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사회 제재 때문에 러시아로의 수출이 금지된 물품이다.
이유가 있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푸틴은 어떻게 일본을 스파이 소굴로 만들었을까’ 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러시아가 일본에 스파이 거점을 세우고 전쟁에 필요한 군사 부품과 기술을 조달 중이라고 보도했다.
NYT에 따르면 해당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건 러시아 정찰총국(GRU) 산하 비밀 정보조직 ‘제20국’이다. 일본에 자리를 잡은 이 조직은 GRU 소속 베테랑 장교 막심 블라디미로비치 필첸코프(49)가 이끌고 있다.
2024년 2월 일본에 입국한 필첸코프는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 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하고 있다. 제20국의 거점 역시 도쿄의 아에로플로트 사무실이다. 일본 경찰청 본부에서 도보로 불과 10분 떨어진 거리의 한 빌딩 22층에 위치해 있다.
지난 5월 일본 도쿄의 도심 빌딩 모습. 러시아는 도쿄 한복판에 스파이 거점을 세우고 전쟁에 필요한 군사 부품과 기술을 조달 중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에서 군사용 물품의 대러 수출은 금지돼 있다. 하지만 필첸코프는 제20국이 일본에 구축한 밀반출망을 통해 군사용으로 전용 가능한 첨단기술 부품을 일본에서 확보한 뒤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 제3국을 거쳐 러시아로 보내고 있다. 대부분 러시아군의 무기에 필요한 첨단 장비, 공작기계, 기타 부품 등이다.
현재는 아에로플로트의 활동이 중단됐지만, 이곳의 일본 협력사인 프로코에어가 지난 3월 운송장에 ‘의료 장비’로 기재된 물품을 러시아 제약사 알팜에 우회 수출하는 등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프로코에어 측은 “제재 대상자에게 고의로 운송을 주선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알팜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의 제재를 받는 크렘린궁 연계 기업이라고 NYT는 전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서방 각국은 자국에 있던 러시아 정보요원 수백 명을 추방하고 크렘린궁과 연계된 기업을 제재했다. 이후 러시아는 일본으로 눈길을 돌렸다. 서방에서 쫓겨난 러시아 정보요원 중 수십 명이 일본에서 다시 포착됐다고 NYT는 전했다.
러시아로 밀수출된 일본산 부품과 기술은 고스란히 우크라이나 공격을 위한 러시아의 드론, 미사일 등 첨단무기 생산에 투입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드론, 미사일의 90%에 일본산 부품이 포함돼 있다고 추산한다. NEC, 파나소닉, 도시바 등 주요 대기업들이 제작한 부품도 포함됐다.
서방 당국은 일본에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밀수 활동을 알리며 수차례 경고를 보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4월 한 달 동안 8차례나 외교 서한을 일본 외무성에 보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지난 6월 일본 도쿄 거리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의 간첩 관련 허술한 법체계가 일본을 러시아 스파이의 온상으로 만들었다는 게 NYT의 지적이다. 간첩 활동을 포괄적으로 처벌하는 법이 없어 지난 1월 도쿄 경시청이 러시아 위장 요원에게 영업 비밀을 유출한 전직 공작기계 제조업체 직원을 수사할 때도 간첩죄가 아닌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2차 대전 전범국이란 오명 속에 중앙 정보기관이 부재했다는 점도 일본이 스파이 천국 취급을 받은 이유 중 하나다.
문제점을 인식한 일본은 지난 5월 일본판 중앙정보국(CIA)으로 불리는 국가정보국 설치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보관리 및 처벌 강화를 담은 스파이 방지법 제정도 추진 중이다.
기하라 미노루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 13일 “급변하는 안보 환경 속에서 일본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중요 정보 획득과 같은 외국 정보 활동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며 “일본은 이 문제를 더욱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