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포르트 드 베르사유 전시장 내 특설 경기장. 지난 1923년 개장해 10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공간이 뜨거운 환호와 함성으로 가득 찼다. 2026 e스포츠 월드컵(EWC) 경기를 위한 공간이었지만, 현장 분위기는 거장 뮤지션의 콘서트장 같았다.
관중들이 열광한 주인공은 단연 ‘페이커’ 이상혁(T1·사진)이었다. 경기장 안팎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응원도구를 흔드는 팬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준결승에서 T1이 아쉽게 탈락하자 눈물을 흘리는 팬들이 속출했다.
대회 주최측인 e스포츠 재단(EF)은 현역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이상혁을 EWC 및 e스포츠 네이션스컵(ENC) 공식 홍보대사로 임명했다. 랄프 라이헤르트 EF 부사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페이커를 언급하지 않고는 e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 탁월한 실력과 절제력, 오랜 기간 최정상을 유지해 온 모습으로 전 세대에 영감을 준 선수”라고 극찬했다.
이상혁은 “다른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EWC와 ENC 앰버서더가 됐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분이 e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EWC는 많은 종목 선수가 한데 모여 같은 자리에서 경기한다. 월드컵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운데)와 함께 e스포츠 월드컵 홍보대사로 선정된 '페이커' 이상혁(오른쪽). 왼쪽은 체스 세계 챔피언 망누스 칼센. 파리=김효경 기자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체스 세계챔피언 망누스 칼센과 더불어 전 세계 딱 세 명에게 주어진 영예다. 파리 시내 중심가 곳곳에 세 홍보대사의 얼굴이 나란히 들어간 포스터가 내걸렸다.
그는 5명이 팀을 이뤄 싸우는 글로벌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살아 있는 역사다. 최고 권위의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 역대 최다 우승(6회) 기록을 세웠다. 지난 202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창설된 ‘e스포츠 올림픽’ EWC에서도 그는 출전 선수를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상혁은 과거 중국 팀으로부터 연봉 2000만 달러(약 298억원)라는 파격적인 계약 제안을 받았지만 흔들림 없이 한국 잔류를 선택했다. 현재도 국내 프로스포츠 최고 수준(추정 연봉 50억~70억원)의 대우를 받지만, 그가 지키는 가치는 돈의 액수를 넘어선다. 한국이 종주국인 e스포츠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 전도사’로서의 사명감이 그의 가치관과 함께 한다. 최근엔 걸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와 CF광고를 찍는 등 대중적 보폭을 넓히고 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것을 하며 재미있게 배워 가는 편이다. 연기도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구글 플레이 광고에 출연한 '페이커' 이상혁(왼쪽)과 애스파의 카리나. 구글 유튜브 캡처
순간 반응과 고도의 판단력이 필요해 20대 초중반을 전성기로 치는 LoL 게이머로서 어느덧 서른에 접어든 그가 각종 최고령 기록을 줄줄이 새로 쓰며 왕좌를 지키는 비결은 철저한 자기 관리에 있다. 평소 꾸준한 운동과 깊은 독서로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안주(安住)’라는 단어를 제일 경계한다는 그는 “최고라는 수식어는 언제나 과거형일 뿐”이라면서 “내 행복과 건강을 빌어주시는 팬들이 많다는 걸 잘 안다. 그 따뜻한 응원을 바탕으로 좋은 모습을 오래 보여드리겠다”고 각오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