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바이오로직스가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인 2조7000억원을 투입해 글로벌 펩타이드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인 폴리펩타이드를 인수한다. 2016년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 이후 그룹 내 최대 규모의 해외 인수합병(M&A)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스위스의 글로벌 펩타이드 위탁개발생산(CDMO) 전문 기업인 ‘폴리펩타이드 그룹’ 지분 100%를 14억6000만 스위스프랑(약 2조7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20일 공시했다. 올해 말까지 인수를 최종 마무리할 계획이다.
정근영 디자이너
이번 인수의 핵심은 최근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GLP-1 계열 비만·당뇨 치료제’ 시장을 선점하는 데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만치료제의 주성분인 ‘펩타이드’는 아미노산이 연결된 물질로, 제조 공정이 워낙 복잡하고 품질 관리가 까다롭다. 이 때문에 글로벌 제약사 10곳 중 6곳 이상(62~64%)이 자체 생산 대신 전문 CDMO에 위탁생산을 맡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기존의 항체의약품 중심 포트폴리오에 이번 펩타이드 역량을 더함으로써, 급증하는 비만약 생산 수요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스위스 바르에 본사를 둔 폴리펩타이드의 지난해 매출은 3억8930만 유로(약 6600억원), 직원 수는 1500여 명이다. 유럽·미국·인도 등 5개국에 6개 생산 거점과 연구개발(R&D) 센터를 두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측은 “1000건 이상의 펩타이드 치료제 관련 개발·생산 실적과 친환경 제조기술을 확보한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공시 문서에 숨겨진 ‘대형 호재’에 주목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이사회 의사록에 이번 인수 효과로 ‘일라이 릴리를 포함한 주요 고객사 관계 및 파이프라인 확보’가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릴리는 현재 글로벌 비만·당뇨 약 시장을 지배하는 ‘마운자로’와 ‘젭바운드’의 제조사다. 폴리펩타이드가 이미 릴리와 거래 관계를 맺어온 만큼, 인수 완료 후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릴리의 대형 비만치료제 물량을 수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예상이 많다.
이번 인수는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가 올해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와 ‘바이오USA’에서 잇달아 강조한 ▶생산 능력 ▶제품 포트폴리오 ▶글로벌 생산·영업 거점 등 이른바 3대 축 확장 전략에 따른 대형 투자다. 회사는 지난 4월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으로부터 미국 록빌 공장을 인수한 데 이어 유럽 생산 기지까지 확보하면서 글로벌 공급망을 강화했다. 기존 한국(송도)과 미국(록빌)에 국한됐던 생산 인프라가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그룹 차원의 의미도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신수종(新樹種) 발굴 주문으로 20여 년 전 연구를 시작한 바이오 사업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체제에서 그룹의 핵심 성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 비즈니스리서치인사이트는 글로벌 펩타이드 CDMO 시장이 올해 55억 달러(약 8조1000억원)에서 2035년 291억 달러(약 43조1000억원)로 연평균 2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 시장에서 스위스 바켐, 독일 코든파마, 중국 우시앱텍 등 글로벌 CDMO 기업들과 경쟁할 전망이다.
다만 조직·사업 통합과 신규 수주 확대는 변수로 꼽힌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폴리펩타이드의 기존 계약을 승계해 안정적 매출 기반을 유지하는 동시에 기존 항체의약품 고객과 교차 수주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인수 완료 전까지 핵심 인력과 기술 이탈 없이 두 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