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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2000년 잠든 폼페이 파피루스 깨우다 [트랜D]

중앙일보

2026.07.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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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고대 로마의 항구도시 폼페이가 이 사건으로 화산재에 파묻혔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같은 날 화산재에 묻힌 도서관도 있었다. 줄리어스 카이사르의 장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서관이다. 이곳에는 약 1800개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보관돼 있었다.

1752년 발굴에서 조각상과 프레스코화, 그리고 수백 개의 두루마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화산의 열기에 타고 산화돼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펼치려 하면 그대로 부서졌다. 수백 개의 두루마리는 그동안 아무도 읽을 수 없는 보물로 잠들어 있었다. 이 오랜 보물상자를 연 것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인공지능(AI)이다.

1890~1905년 무렵의 폼페이 유적 모습.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됐다. 폼페이는 지금까지도 16세기부터 지금까지 고고학의 주요 관심사다. 사진 미국 국회도서관

1890~1905년 무렵의 폼페이 유적 모습.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잿더미가 됐다. 폼페이는 지금까지도 16세기부터 지금까지 고고학의 주요 관심사다. 사진 미국 국회도서관

275년의 침묵을 깨다
2023년 3월, 총 170만 달러(약 25억원) 상금이 걸린 베수비오 챌린지가 열렸다. AI를 이용해 두루마리를 읽어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AI는 언어 자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CT 영상을 통해 파피루스의 미세한 구조 변화와 잉크 흔적을 찾아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문자 형태로 복원한다. 검은 바탕에서 검은 글씨를 찾는 것과 같은 난제였다.

이듬해 2월, 마침내 성과가 나왔다. 세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팀이 대상을 차지해 70만 달러(약 10억원)를 받았다. 이들은 컴퓨터 비전과 AI를 활용해 두루마리 한 개의 15개 열을 해독해냈다. 기원전 1세기 철학자 필로데무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에는 음악과 음식을 비롯한 인간의 즐거움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었다. 2000년 만에 고대의 목소리가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세 학생은 수상 이후 프로젝트의 정식 연구원으로 합류했고, 이후 머신러닝 모델 개발과 텍스트 해석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맡게 됐다.

탄화된 고대 두루마리. 베수비오 챌린지에서는 AI를 이용해 두루마리를 읽어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사진 베수비오 챌린지 공식 홈페이지

탄화된 고대 두루마리. 베수비오 챌린지에서는 AI를 이용해 두루마리를 읽어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사진 베수비오 챌린지 공식 홈페이지

도전에 실리콘밸리도 가세했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머스크재단은 약 200만 달러(약 29억원)를 기부해 프로젝트의 후속 연구 자금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머스크는 “문명의 계몽에 찬성한다”며 후원 이유를 밝혔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냇 프리드먼 깃허브 최고경영자(CEO)는 1달러(약 1480원)당 고대 텍스트 한 단어를 복원하는 수준까지 복원 비용을 낮추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두루마리 하나를 통째로 읽다
그리고 지난 6월 26일, 나폴리 국립도서관에서 역사적인 발표가 나왔다. 두루마리 한 개를 물리적으로 펼치지 않고 거의 전체를 연속적으로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복원한 것이다. 한 두루마리에서 약 1.5m, 20개 열에 달하는 연속 글자가 복원됐다. 지금까지 조각과 단편만 해독하던 수준을 넘어 하나의 완결된 글을 읽게 된 것이다. 윤리와 인간의 삶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같은 발표에선 또 다른 두루마리에서 ‘필로데무스, 신들에 관하여, 제8권’이라는 제목도 확인됐다. 지금까지 1권만 알려져 있던 이 작품이 최소 8권으로 이뤄진 시리즈물이었음이 2000년 만에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 600개 이상의 두루마리가 미개봉 상태로 남아 있으며, 아직 발굴되지 않은 빌라 하층부가 존재할 가능성과 함께 그곳에서 라틴어 문헌이 추가 발견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AI를 활용해 고대 문헌을 읽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는 이미지 처리나 AI 성능보다 그것을 읽고 편집하고, 해석할 전문가가 더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러나 AI가 글자를 찾아내고 복원하는 역할을 점점 더 잘 수행할수록, 그 글이 담고 있는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AI는 패턴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그 패턴이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판단하는 능력은 아직 인간의 통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어 비문 분석. 이제는 AI를 활용해 고대 문헌을 읽어내는 것보다 그것을 읽고 편집하고 해석할 전문가가 더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사진 구글 딥마인드

고대 그리스어 비문 분석. 이제는 AI를 활용해 고대 문헌을 읽어내는 것보다 그것을 읽고 편집하고 해석할 전문가가 더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사진 구글 딥마인드

AI가 깨우는 고대의 목소리는 베수비오에만 머물지 않는다. 구글 딥마인드의 이타카(Ithaca)는 손상된 고대 그리스 비문 복원에서 약 62%의 정확도를 보였으며 인간 연구자와 함께 사용할 경우 정확도가 70% 이상으로 향상되는 것으로 보고됐다. 뮌헨대는 AI로 4000년 된 점토판 조각을 맞춰 길가메시 서사시(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의 문학 작품)의 미발견 장면을 복원했다. 페루 나스카 사막에서는 AI가 100년 동안 인간이 발견한 것보다 많은 수백 개의 새로운 지상 그림을 찾아냈다.

베수비오의 성공은 다른 도전에 불을 지폈다. 지난해 인도 타밀나두주 정부는 약 5000년 전 인더스 문명에서 사용된 미해독 문자를 해독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100만 달러(약 14억8000만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인더스 문자는 약 4000여 개의 인장이 발견됐지만 대부분 글자 수가 5~6자에 불과해 언어의 규칙을 추론하기 어렵다. 미노아 문명의 선형문자 역시 발견된 지 1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해독 상태다. 케임브리지대를 비롯한 여러 연구진이 AI를 활용해 해독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AI라는 타임머신의 한계와 가능성
다만 중요한 구분이 있다. 베수비오 챌린지가 해독한 것은 ‘아는 언어’였다. 이미 해독된 언어가 탄화 때문에 물리적으로 읽히지 않았을 뿐이다. 반면 인더스 문자나 선형문자처럼 아직 해독되지 않은 문자는 언어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난제다. AI는 문자의 패턴을 분석하고 가능한 해석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와 역사적 맥락까지 스스로 밝혀낼 수는 없다.

DOGE 팀원 패리토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폼페이 유적 파피루스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해독했다. 사진 베수비오 챌린지

DOGE 팀원 패리토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폼페이 유적 파피루스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해독했다. 사진 베수비오 챌린지

한 문자 전문가는 “AI는 부조종사일 뿐, 인문학자의 눈이 없으면 해독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대문서의 연대 추정에서도 일부 연구자는 AI의 결론이 기존 역사적 증거와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AI가 강력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최종적인 해석과 검증은 여전히 인간 연구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AI는 탄화된 두루마리를 읽고 손상된 비문을 복원하며, 수천 개의 점토판 조각과 사막에 숨은 지상 그림에서 인간이 놓친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과제들이 이제는 계산 능력과 알고리즘으로 풀어볼 수 있는 문제가 되고 있다.

인류 역사에는 아직 읽지 못한 두루마리와 해독하지 못한 문자, 발견되지 않은 유적이 셀 수 없이 남아있다. AI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보여주는 마법이 아니라 잊힌 기록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도구다. 앞으로 이 도구가 얼마나 더 많은 고대의 목소리를 세상으로 되돌려 놓을지는 미래의 발굴과 연구가 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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