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주년 6·25전쟁 기념식이 지난달 LA총영사관 주최로 오렌지카운티 풀러턴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행사장 한편에는 한인 사회의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세워진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비석에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미군 전사자 3만 60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비석 앞에 선 순간, 전쟁의 참혹함과 희생의 숭고함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얼마 전에는 콜로라도주 오로라 시에도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건립된다는 뉴스를 접했다. 한인 인구가 35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도 후손들에게 역사를 전하고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뜻깊은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감개무량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22만여 명이나 되는 한인이 살고 있는 LA에는 아직도 한국전쟁을 기리는 변변한 충혼비 하나 없다는 사실이다. 해외 최대 한인 거주지에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수많은 한국군을 기억할 상징물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다행히 작은 희망은 시작되었다. 6·25참전유공자회 노병들이 먼저 뜻을 모아 매칭펀드를 위한 ‘씨앗 기금’을 마련한 것이다. 이제 그 작은 씨앗이 많은 사람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큰 나무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다. 6·25전쟁이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 속에서도 수많은 젊은이의 피와 눈물, 그리고 자유를 지키려는 희생이 있었기에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특히 18만4000여 명에 달하는 국군 전사자들은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침묵이 곧 잊힘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후손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가르치며, 희생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충혼비는 단순한 돌기둥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교실이며, 감사와 애국심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이다.
‘Korean War Veteran’이라는 글귀가 적힌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다 보면 낯선 미국인이 다가와 “Thank you for your service(헌신에 감사한다)”라고 따뜻하게 인사하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 짧은 한마디에는 희생을 존중하는 사회의 품격이 담겨 있다. 우리 한인 사회에도 이러한 문화가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충혼비는 과거를 위한 기념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우리 자녀들과 손주들이 그 앞에 서서 지금의 자유가 얼마나 값비싼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작은 정성 하나가 큰 역사를 만든다. LA 한인 사회의 뜻있는 동포들이 이 숭고한 뜻에 함께해 주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 충혼비는 어느 한 단체만의 사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이며, 후손들에게 남겨 줄 소중한 유산이다. 큰 기부가 아니어도 좋다. 한 사람의 작은 정성이 모이면 역사는 세워진다. 참전용사들이 모두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의 희생을 돌에 새기고 후손들의 가슴에 새겨야 한다.
뜻있는 한인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참여가 LA 한인 사회의 자랑이 될 6·25전쟁 충혼비를 세우는 초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제는 기억을 역사에 남기고, 그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