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에서 산업용 로봇을 만드는 A업체는 수주 계약을 따 낼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납기일 때문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라 직원 45명이 한 주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52시간으로 제한돼 있지만, 납기일을 지키지 못하면 발주기업에 적지않은 지체상금을 내야 한다.
22일 이 기업 인사팀장 B씨는 “대부분의 계약서엔 우리가 설비를 제때 납품하지 못해 발주기업의 생산 일정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며 “제작·생산 물량이 집중되는 4~10월과 비수기에도 주 52시간은 지켜야하기 때문에 인력 운용에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했다.
박경민 기자
A 기업 같은 경우 ‘특별연장근로’를 신청해 고용노동부의 인가를 받는 방법은 있다. 특별연장근로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와 근로자의 개별 동의를 거쳐 주 12시간을 연장해 총 64시간까지 허용되는 제도다. 특별한 사정에 해당하는 사유는 ▶재난·사고 ▶인명 보호 ▶시설 고장 등 돌발 상황 ▶업무량 급증 ▶연구개발 등이다.
하지만 B씨는 “근로자 개별 동의를 받더라도 준비해야 할 서류가 많아 검토하다가 포기한 적도 있다”며 “무엇보다 한국의 근로시간 제한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해외 고객사들이 거래처를 다른 나라로 바꿀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특별연장근로 신청에 필요한 서류는 10개가 넘는다. 신청서와 동의서 말고도 발주서와 계약서, 납기 조정 내역, 생산 계획, 대체 인력 투입 노력과 예상 손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 등을 제출해야 한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중소기업으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앙일보 취재 결과 이 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은 전체 주 52시간제 적용 대상 기업(5인 이상 80만 곳)의 0.3% 수준에 그쳤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특별연장근로’ 인가를 받은 기업은 2022년 2938곳에서 지난해 2185곳으로 감소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업무량 급증 사유로 인가를 받으려면 ‘통상적이지 않은 이유로 업무량이 대폭 증가해 사업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한 경우’란 점을 기업이 입증해야 한다”며 “기준이 모호한 데다 증빙 부담도 커 신청 자체를 망설이는 기업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상황이 긴급할 경우 ‘사후 승인’을 신청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사유를 더욱 엄격하게 검토한다는 게 고용부의 설명이다. 현행법상 주 52시간제를 위반한 사용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신청을 중도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인천의 한 식료품 임가공 중소기업의 임원은 “중소기업들 사이에선 신청했다가 인가도 못 받고, 일을 오래 시키는 기업으로 인식돼 근로감독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고 했다. 이어 “고환율·고유가로 원재료와 포장재 가격이 올라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 52시간제로 생산 차질과 인력 이탈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소기업 현장에선 주 52시간제의 취지와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자동차부품 기업의 인사 담당자 C씨는 “근무 시간이 줄어든 만큼 임금이 줄고, 이를 메우기 위해 퇴근 뒤 대리운전이나 배달 등 부업을 하는 근로자도 적지 않다”면서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생산라인 일부를 자동화했고, 그 결과 오히려 신규 채용 규모는 예전보다 줄었다”고 전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중소기업의 경우 노사 합의 시 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월·분기·연 단위 등으로 유연하게 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특별연장근로 인가 요건도 현장 여건을 반영해 합리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