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문득 귀를 기울이면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일반 가위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무쇠로 만들어서, 부딪힐 때마다 ‘찰깍찰깍’ 하는 특유의 맑고 경쾌한 쇳소리다.
그 소리만 들리면 골목은 금세 들썩였다. 아이들은 빈 병을 들고 뛰어나왔고, 나도 할머니의 고무신을 들고 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엿 위에 날카로운 끌(정)을 대고 작은 나무망치로 ‘딱, 딱, 딱!’ 치면, 엿이 원하는 크기로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당시 아이들에게 엿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여기에 코끝을 스치는 칡 냄새까지 더해지면 골목은 어느새 활기 넘치는 작은 장터로 변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약장수였다. 풍각쟁이의 북소리가 둥둥 울리면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 빈터로 모여들었다. 나도 부엌일 하던 언니의 손을 잡고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던 약장수는, 마술과 원숭이 재주까지 곁들이며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명 나게 판을 벌이던 그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아버지 모셔와!”
그 말이 떨어지면 아이들은 정말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모셔와야만 그다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장수는 커다란 유리병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 약 한 제만 먹으면 뱃속 회충이 이렇게 다 나옵니다.” 병 속에서 꿈틀거리던 굵은 회충은 사람들의 눈길을 단숨에 붙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허풍도 적지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주머니를 열었다.
할머니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고쟁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사 오시던 고약도 기억에 선하다. 몸에 종기나 부스럼이 나면 정성스레 붙여 주셨고,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플 때도 약장수의 약 한 봉지는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다. 믿음이 약효를 키우던 정겨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이 산 것은 비단 약만이 아니었다. 웃음을 샀고, 위안을 샀고, 하루의 쏠쏠한 즐거움을 샀다. 문화시설 하나 없던 시절, 약장수의 북소리는 연극의 시작이었고 그의 입담은 입체적인 공연이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빈터는 마을의 열린 극장이 되었고, 약을 사지 않아도 함께 웃고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없이 넉넉해졌다.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다. 병원과 약국은 문만 열면 있고, 손안의 휴대전화로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골목에서 함께 웃던 풍경은 점점 사라져 갔다. 몸의 병은 더 잘 고치게 되었을지 몰라도, 현대인의 깊은 외로움까지 덜어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가끔은 귓가에 그 우렁찬 목소리가 그리움처럼 되살아난다.
“애들은 가라! 아버지 모셔와!”
그 한마디에는 약을 팔려는 장삿속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 함께 웃게 하며, 사람 냄새가 물씬 배어 있던 시간을 만들어 내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한 것은 약장수의 묘약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과 온기를 나누며 하루를 함께 살아 내던 그 골목의 시간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