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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도 취하는 방?”…예산 사과밭 지하에 숨겨진 보물창고 [장진영의 술술 푸는 이야기]

중앙일보

2026.07.24 15:00 2026.08.0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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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제야 알겠어. 아마 칼바도스였을 거요. 노르망디에서 나는 사과로 만든 브랜디지. 마셔 보았소?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파리를 다룬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는 사과로 만든 독주 '칼바도스'가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영혼 같다는 술. 이름도 낯선 술. 게다가 풋풋한 사과로 독하디 독한 술을 만든다니. 도대체 어떤 맛일까 궁금해진다.

칼바도스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로 만드는 증류주다. 사과를 발효, 증류해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40~50도를 오가는 독주로 은은한 갈색빛이 특징이다.
충남 예산의 한 사과밭에는 '칼바도스만큼은 한국에서 가장 잘 만든다'고 자부하는 예산사과와인이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사과 브랜디를 '칼바도스'라고 한다. 한국형 칼바도스 '추사'는 은은한 갈색빛이 특징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사과 브랜디를 '칼바도스'라고 한다. 한국형 칼바도스 '추사'는 은은한 갈색빛이 특징이다.

예산사과와인에서 생산하는 증류주와 사과와인, 포트와인. 제품명 '추사(秋史)'는 가을 사과를 의미하고, 충남 예산은 추사 김정희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산사과와인에서 생산하는 증류주와 사과와인, 포트와인. 제품명 '추사(秋史)'는 가을 사과를 의미하고, 충남 예산은 추사 김정희의 고향이기도 하다.


" 농촌이 이렇게 멋있다고? "
정제민(59) 예산사과와인 대표는 90년대 캐나다 이민 시절 와이너리 문화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업과 농촌은 노동이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포도밭 한가운데에서 와인과 음식을 즐기며 결혼식, 파티, 음악회까지 열리는 장면을 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그런 곳이 지역 경제를 이끄는 중심이라는 사실도 놀라웠고요.”
그 경험은 하나의 결심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농업과 양조를 결합한 와이너리를 꼭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정제민 예산사과와인 대표가 숙성실에서 칼바도스를 시향하고 있다.

정제민 예산사과와인 대표가 숙성실에서 칼바도스를 시향하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직접 몸으로 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호회를 만들고 각종 과실 산지를 찾아다니며 술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포도 와이너리를 꿈꿨지만 적당한 양조용 포도 품종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때 처가가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길을 열었다. 예로부터 예산지역은 자연재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일조량이 많아 당도 높은 사과를 생산하는 곳이다.
“사과 품질 만큼은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었으니까요”
예산에 위치한 사과밭을 중심에 두고, 그 안에 양조장과 체험·관광 시설을 함께 짓는 ‘사과 와이너리’ 구상이 시작된 것이다.
“술이 먼저가 아니고 원료가 생산되는 밭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정 대표는 본격적인 생산에 앞서 사과밭 체험과 음악회, 축제를 결합한 페스티벌을 먼저 열어, 산지와 관광이 결합한 모델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험해 봤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예산사과와인 전경. 사과밭을 중심으로 양조공간과 체험공간 등이 위치했다.

충남 예산에 위치한 예산사과와인 전경. 사과밭을 중심으로 양조공간과 체험공간 등이 위치했다.


칼바도스는 '사과 세척-착즙-발효-증류-숙성-병입'의 단계로 만들어진다. 부사, 시나노 골드, 감홍, 홍로 등 맛이 좋은 6가지 사과 품종을 섞어서 만든다. 복합적인 향과 맛을 내기 위함이다. 원료와 물, 효모 외에는 다른 어떠한 첨가물도 넣지 않는다. 지난 2010년 사과 와인 ‘추사 애플 와인’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본격적인 증류주 생산에 돌입했다. 현재 사과 와인을 비롯해 오크 숙성 사과 브랜디 ‘추사40’, ‘추사50’, 맑은 증류주인 ‘추사백25’, ‘추사백40’, 한정판 제품 ‘몽로’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곳의 간판 제품 '추사40' 500mL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과 원물 6.7㎏, 약 30개의 사과가 필요하다. 지난해 사과 500t을 이용해 30억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사과 700t 규모로 생산량을 늘릴 예정이다.
최근 양조에 사용한 사과. 이곳의 간판 제품 추사40 한 병에 약 30개의 사과가 필요하다.

최근 양조에 사용한 사과. 이곳의 간판 제품 추사40 한 병에 약 30개의 사과가 필요하다.


칼바도스를 증류하는 다단식 동 증류기.

칼바도스를 증류하는 다단식 동 증류기.

예산사과와인의 보물창고는 지하에 있다. 사과를 착즙해 1차 발효한 와인 형태의 원주는 ‘다단식 동 증류기’로 모인다. 일반적인 위스키나 코냑은 단식 증류기를 통해 두세번 증류하지만, 다단식 증류기의 경우 여러차례 순환 증류를 통해 응축된 원액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이브리드 증류기인 셈이다. 동 재질의 증류기는 좋지 않은 향을 걸러내고 단맛을 부드럽게 끌어올리는 기능을 한다.

'천사도 취하는 방'이라고 불리는 숙성실. 달큰한 술향으로 가득하다.

'천사도 취하는 방'이라고 불리는 숙성실. 달큰한 술향으로 가득하다.

정 대표가 오크통을 점검하고 있다.

정 대표가 오크통을 점검하고 있다.

" 천사들도 취하는 방 "
증류실 옆에는 숙성실이 있다. 숙성과정을 거치며 시간의 향과 깊이가 더해지는 공간이다. 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 300L 용량의 오크통 800여개가 빼곡하게 쌓여있고, 숙성실 안은 달큰하고 은은한 술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오크통 안에서 숙성되는 술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익어가는 동안 해마다 약 5%가 정도가 자연 증발한다. 이것을 ‘천사의 몫’이라고 한다.

오크통 안에 들어 있는 술을 테이스팅 하기 위해 베럴띠프(Barrel Thief)를 이용해 술을 뽑아 올리고 있다.

오크통 안에 들어 있는 술을 테이스팅 하기 위해 베럴띠프(Barrel Thief)를 이용해 술을 뽑아 올리고 있다.

숙성실의 또 다른 볼거리는 다양한 오크통이다.
“요즘 세계적인 위스키나 브랜디의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예전에는 숙성 연도로만 차별화를 했었다면 이제는 와인이나 셰리 같은 다른 술을 담았던 오크통에 증류주를 다시 숙성하는 방식이죠”
정 대표는 이를 ‘술의 DNA를 교환한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들여온 포트, 셰리, 시라즈, 심지어 샤토 마고를 담았던 오크통들이 빽빽하게 쌓여있다.
정 대표는 좋은 오크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최근에는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샤또 마고를 구하기 위해 보르도를 다녀왔다.
“샤또 마고 오크통 5개를 구할 수 있다해서 갔는데 다른 평범한 오크통 153개를 끼워팔기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다 사 왔죠”
다양한 와인이 담겼던 오크통들. 현재는 칼바도스가 담겨 숙성되고 있다.

다양한 와인이 담겼던 오크통들. 현재는 칼바도스가 담겨 숙성되고 있다.


샤또 마고가 담겼던 오크통.

샤또 마고가 담겼던 오크통.

최근 술 소비는 '수집'으로도 전개되고 있다. 이에 인기 작가들과 협업으로 소량의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한다. 왼쪽 첫째와 둘째는 웹소설 '나노마신'과의 협업 제품, 가운데는 배우 '박성웅 에디션', 오른쪽 두개는 고우영 화백의 '적토마 에디션'.

최근 술 소비는 '수집'으로도 전개되고 있다. 이에 인기 작가들과 협업으로 소량의 에디션을 출시하기도 한다. 왼쪽 첫째와 둘째는 웹소설 '나노마신'과의 협업 제품, 가운데는 배우 '박성웅 에디션', 오른쪽 두개는 고우영 화백의 '적토마 에디션'.

이곳의 진짜 이야기는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는 늦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과 따기와 애플파이 만들기 체험, 과수원 음악회, 와이너리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제조 공간을 체험의 장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시도로 농촌진흥청의 농촌융복합상품화 모델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방문객은 외국인의 비중이 70%에 달한다.

정 대표는 100년, 200년 후에도 예산사과와인을 만나볼 수 있을거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정 대표는 100년, 200년 후에도 예산사과와인을 만나볼 수 있을거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예산사과와인의 국내외 수상 내역들. 최근 '2026 IWSC(국제와인품평회)'에서 98점을 얻어 과실 증류주 부문 최고 등급인 금상과 과실주 부문 최고상을 동시에 받았다.

예산사과와인의 국내외 수상 내역들. 최근 '2026 IWSC(국제와인품평회)'에서 98점을 얻어 과실 증류주 부문 최고 등급인 금상과 과실주 부문 최고상을 동시에 받았다.

" 100년, 200년 후에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
정 대표는 전문성을 갖춘 다음 세대를 통해 역사를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아들은 양조를 전공했고 조카는 농업을 전공해 이미 현장에 뛰어들었어요”
이어 ‘단지 술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농업과 양조, 그리고 지역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산의 사과 한 알이 술로 다시 태어나고, 그 술을 매개로 지역과 체험이 만나며, 시간과 정성이 쌓여 역사로 이어지는 곳. 정 대표가 그리는 예산사과와인의 미래다.



술은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함께 익어갑니다. [장진영의 술술 푸는 이야기]는 우리 땅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술을 향한 여정입니다. 계절, 장소, 사람과 함께 익어가는 이 땅의 양조장들을 소개합니다.




장진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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