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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던 골목에 스타 셰프 모여든다…군산 600평 ‘문화 실험’ [비크닉]

중앙일보

2026.07.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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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모습을 드러낸 리터닝 군산 전경. 600평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즈클럽, 호텔, 레스토랑, 카페 등 9개의 시설이 밀집돼 있다. 사진 김종오, 리터닝 군산 제공

지난해 모습을 드러낸 리터닝 군산 전경. 600평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즈클럽, 호텔, 레스토랑, 카페 등 9개의 시설이 밀집돼 있다. 사진 김종오, 리터닝 군산 제공


항만도시의 흥망과 근대의 흔적이 겹겹이 남아 있는 전북 군산시 영화동. 구도심 골목 사이에서 경쾌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낡은 단란주점 간판마저 쓸쓸해 보이는 골목을 지나 작은 입구를 통해 중정 내부로 한 발 들어서자 ‘딴 세상’이 펼쳐진다. 미로 같은 골목을 따라 재즈클럽과 카페·레스토랑·호텔·젤라토 가게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6일, 휴일을 앞두고 찾은 군산 영화동 골목은 저녁 식사와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늦은 시간까지 북적였다.

리터닝 군산의 중정은 낮에는 젤라토를 즐기는 사람들로, 밤에는 칵테일과 음악을 즐기려는 이들로 붐빈다. 노베오 젤라토는 '카카오봄' 고영주 대표가 제조 기술을 전수했고, 바 인그리드는 '코블러' 유종영 대표 바텐더가 바텐딩 교육을 담당했다. 사진 김종오, 리터닝 군산 제공

리터닝 군산의 중정은 낮에는 젤라토를 즐기는 사람들로, 밤에는 칵테일과 음악을 즐기려는 이들로 붐빈다. 노베오 젤라토는 '카카오봄' 고영주 대표가 제조 기술을 전수했고, 바 인그리드는 '코블러' 유종영 대표 바텐더가 바텐딩 교육을 담당했다. 사진 김종오, 리터닝 군산 제공


한때 쇠락의 상징이던 골목이 지금 군산에서 가장 감각적인 밤을 보내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1980㎡(약 600평)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인 이곳의 이름은 ‘리터닝 군산’. 도심 지역에 사람과 자원을 불러들이는 이른바 ‘앵커 시설’이다. 지난해 6월부터 9개의 공간이 차례로 문을 열며 구도심의 풍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소설가 황석영과 사진가 민병헌이 단골로 찾는 곳이자 유명 셰프와 문화 예술인이 정착하는 동네. 이름처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곳이 됐다.

100년의 세월을 품은 공간
리터닝 군산은 구도심의 역사와 현재를 잇는 독특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1910~1920년대 사이 지어진 적산가옥과 1960~70년대 조적조(벽돌) 미장 건물이 공존한다. 이 일대는 해방 직후 미군 유흥업소가 밀집하며 번성했지만, 이후 신도시 개발의 물결에서 비켜나며 오랫동안 쇠락을 겪었다. 손진 이손건축 대표는 “100년 된 건물의 구조와 역사적 의미는 살리되 새로운 재료와 공법으로 앞으로 100년을 이어갈 건축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이 다시 흐를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기존 골목 구조를 그대로 살려 내부에서 '피가 돌게' 설계했다. 미로같은 구조 때문에 방문객이 길을 잃는 일도 다반수다. 사진 김종오, 리터닝 군산 제공

기존 골목 구조를 그대로 살려 내부에서 '피가 돌게' 설계했다. 미로같은 구조 때문에 방문객이 길을 잃는 일도 다반수다. 사진 김종오, 리터닝 군산 제공


리터닝 군산의 특징은 밖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던 공간이 안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다섯 곳의 출입구와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 가운데 자리한 중정은 옛 건물의 구조와 흔적을 최대한 살린 결과다. 공간 곳곳에서는 과거의 흔적이 현재의 쓰임으로 이어진다. ‘바 인그리드’의 길고 넓은 바 테이블은 옛 군산조선은행의 대들보를 다듬어 만든 것이다. 정유미 리터닝 군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리노베이션 당시 목수가 철거 때 보관하던 것”이라며 “1922년 지어진 건물과 같은 시간을 품은 대들보가 다시 이 공간에 쓰임을 갖는건 신기한 이치”라고 설명했다.


근처 적산가옥에는 레스토랑과 바, 재즈클럽이 들어섰고, 그 옆에는 옛 여관 자리에 새롭게 지은 3층 규모의 ‘호텔 인그리드’가 자리한다. ‘인그리드(Ingrid)’는 군산 원도심에 남아있는 격자형 골목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이름이다. 총 24객실 규모에 방 타입만 9가지로, 나홀로 여행자부터 가족 단위까지 다양한 방문객을 고려했다. 긴 복도와 자연광이 내리쬐는 아트리움은 군산에서 머무는 경험을 색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일반적인 호텔이 객실을 중심으로 레스토랑과 카페 같은 부대시설을 배치하는 것과 달리, 리터닝 군산은 반대의 구조다. 재즈클럽과 레스토랑, 카페, 바가 모인 중정의 ‘그라운드’가 중심이고 호텔은 방문객의 체류 시간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호텔 인그리드 객실에는 모두 발코니가 있다. 군산의 도심 풍경과 '그라운드 존'에서 울려퍼지는 활기를 직접 경험하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사진 리터닝 군산

호텔 인그리드 객실에는 모두 발코니가 있다. 군산의 도심 풍경과 '그라운드 존'에서 울려퍼지는 활기를 직접 경험하라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사진 리터닝 군산


인구 28만 도시에서 재즈가 통할까
리터닝 군산의 시작은 재즈클럽이었다. 프로젝트를 이끈 송성진 대표는 “인구 30만도 안 되는 도시에서 재즈클럽을 연다고 하니 주변에서 다 말렸다”고 입을 떼며 “하지만 군산은 역사적으로 문화 수용성이 높은 곳이고, 특유의 한적하고 가라앉은 지역 분위기가 재즈 음악과 어울릴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군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재즈 공연 기획자로 활동했고 베네치아에서 배운 요리 솜씨로 레스토랑도 운영했다. 밤마다 음악가와 관객이 모여드는 재즈클럽은 그가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재즈클럽 머디는 갯벌을 개간한 구도심의 특징에서 이름을 따왔다. 국내외 재즈 뮤지션이 공연을 자처할만큼 수준높은 음향시설과 분위기를 자랑한다. 이소진 기자

재즈클럽 머디는 갯벌을 개간한 구도심의 특징에서 이름을 따왔다. 국내외 재즈 뮤지션이 공연을 자처할만큼 수준높은 음향시설과 분위기를 자랑한다. 이소진 기자


지난해 6월 문 연 ‘재즈클럽 머디’는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다. 실력파 재즈 뮤지션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해외 뮤지션까지 공연을 자청하는 무대로 자리 잡았다. “음향 시설 하나만큼은 최고로 갖췄고, 공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구현한 덕분”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40평 남짓한 공간, 60명 규모의 클럽은 공연마다 대부분 만석이고 올해 공연 일정도 이미 꽉 찼다. 공연을 찾는 관객의 70%는 군산 시민이다. 좋은 문화 공간은 대도시에 있어야 한다는 통념을 뒤집은 셈이다.

“나야, 낭만 채권단”... 수익보다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
리터닝 군산 프로젝트는 “고향에도 남부럽지 않은 문화 놀이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여러 사람의 바람으로 세워진 공간이다. 시작은 송 대표의 뜻에 공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를 비롯해 의사·변호사·교수·기획자 등 6명이 뜻을 모아 ‘공유인’ 유한회사를 만들고 각자 자금을 보태 사업의 첫발을 뗐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순수 민간 자본 210억원이 투입됐고, 완성까지 7년이나 걸렸다. 코로나 이후 인건비와 자재비가 급등한 탓이다. 방화지구 규제 문제까지 겹치며 2024년 자금경색을 맞았다. 이때 손을 내민 건 다름 아닌 지역 사람들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주민과 같이 일하던 직원 등 40여 명이 이자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8억원을 모아 힘을 보탰다. 농담으로 “어, 나야. 낭만 채권단”이라고 소개하는 지원군들이다. 송 대표는 “투자 목적으로 자본이 모였다면 지금의 리터닝 군산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바라는 건 언젠가 다음 세대가 이 공간을 이어받아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 리터닝 군산은 그렇게 자본보다 사람의 의지로 완성됐다.

2010년부터 군산에서 영업중인 파라디소 페르두또(이탈리아 어로 '실낙원')를 전신으로 하는 '파라디소 90'. '90'은 주소지인 '구영길'을 모티브로 따왔다. 사진 리터닝 군산

2010년부터 군산에서 영업중인 파라디소 페르두또(이탈리아 어로 '실낙원')를 전신으로 하는 '파라디소 90'. '90'은 주소지인 '구영길'을 모티브로 따왔다. 사진 리터닝 군산

사람이 공간을 완성한다
자본이 공간을 완공했다면, 사람은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이태원에서 포카치아 빵으로 유명한 트레비아의 손진아 셰프, 부산의 로스터리 카페를 운영하던 바리스타 등 약 20명의 업계 전문가가 손 대표를 따라 군산에 정착했다. 공유인 사람들이 ‘프렌즈 그룹’이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파라디소 90’, 젤라토 가게인 ‘노베오’, 일식 오마카세 바인 ‘에이와’ 등에서는 수십 년 경력의 전문가들이 수준 높은 미식 경험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 이웃으로 국내 출판 1세대인 프로파간다의 ‘그래픽숍’, 미러볼뮤직을 만든 이창희 대표와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및 동료들이 만든 ‘스테이 엘까미노’, 서울에서도 한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는 ‘멜로우아웃 바버샵’과 패션 편집숍이 자리하면서 문화 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시장 수요를 따라가는 도시와 달리 ‘좋은 사람’을 따라 불어나는 이곳만의 확장 방식이다.

송 대표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좋은 식당을 평가할 때 그곳에 ‘일 키아소(Il Chiasso·사람들이 만드는 활기와 기분 좋은 소음)’가 있는지를 본다”면서 “어제도 바와 레스토랑에서 이런 ‘일 키아소’를 느꼈는데, 이런 활기가 호텔 발코니에도 전해져 다 함께 그라운드에서 노는 모습을 꿈꾼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는 민간 주도 도시 재생사업으로 2025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및 코리아디자인어워드, 한국 건축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사진 리터닝 군산

프로젝트는 민간 주도 도시 재생사업으로 2025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및 코리아디자인어워드, 한국 건축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사진 리터닝 군산

지역의 단단한 놀이터를 만든다
‘군산에는 3대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개항 이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도시인 만큼 토박이 문화가 옅다는 뜻이다. 대신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포용하는 품을 갖춘 도시다. 리터닝 군산의 문화 실험은 그런 지역 특수성 위에서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공간 대부분 지난해 문 열었지만, 운영진이 입소문을 내는 데 큰 공을 들이지 않았다. 당장의 방문객보다 먼저 이곳을 ‘지역민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터닝 군산이 비로소 제 시스템을 갖추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도 이곳을 가장 많이 찾는 사람은 여행객이 아니라 군산 시민이다.

인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송 대표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나고 자란 동네’”라며 “공간을 만든 뒤 ‘어릴 적 살던 골목을 오랜만에 다시 와봤다’는 군산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말했다. 이어 “리터닝 군산은 누군가의 잃어버린 동네를 되찾아 주는 일”라며 “언젠가는 군산만의 근사한 놀이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일부러 찾는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b.플레이스
“거기 가봤어?” 요즘 공간은 브랜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장소를 넘어 브랜드의 태도와 세계관을 담으니까요. 비크닉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합니다. 화제의 공간을 만든 기획의 디테일을 들여다봅니다.



이소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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