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던 시대가 저물자, “내가 신이 되겠다”는 시대가 열렸다.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으로부터 150년, 인류는 그 빈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다. 같은 도시에서 반세기를 사이에 두고 닮은 목소리가 울린다.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히피들은 명상 방석에 앉아 “네 안의 신을 깨우라”고 외쳤다. 오늘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서버 앞에 앉아 “곧 우리는 죽음을 정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꽃을 꽂은 머리가 인공지능 코드로, 피우던 향이 서버로 바뀌었을 뿐, 두 목소리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둘의 혈연은 우연이 아니다.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프레드 터너가 밝혀냈듯이, 히피 문화의 잡지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 자급자족적 대안 삶을 소개한 잡지)’를 만든 스튜어트 브랜드는 훗날 실리콘밸리 초기 온라인 공동체의 산파가 되었다. “네 안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던 히피의 언어는 오늘 트랜스휴머니즘, 즉 기술로 죽음과 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사상으로 다시 피어났다.
구글이 세운 생명 연장 기업 캘리코(Calico)는 노화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접근하고,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Neuralink)는 뇌에 칩을 심어 기계와 인간을 연결하려 하며, 알코어(Alcor) 같은 냉동보존 기관은 시신을 얼려 미래의 부활을 기다린다. 히피와 실리콘밸리를 잇는 계보는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물론 실리콘밸리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오픈AI와 딥마인드 내부에서도 위험을 경고하며 규제를 요구해 온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두 시대를 이끈 지배적 정신은 방법만 다를 뿐 방향이 같다. 초월자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빈자리에 인간 자신, 혹은 인간이 만든 지능을 앉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에덴의 뱀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속삭였고(창 3:5), 바벨의 사람들은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았다. 그 옛 속삭임은 오늘 이렇게 번역된다. “당신의 데이터가 당신을 영원하게 하리라.” 고인의 말투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인공지능 추모 서비스는 우리의 데이터가 육체 없는 두 번째 자아로 살아남으리라 약속한다.
돌아가신 부모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화면 앞에 앉아본 이라면 안다.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메아리일 뿐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던 온기는 어떤 데이터로도 복원되지 않는다.
이는 엔지니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침마다 인공지능의 추천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기술에 무엇을 맡기고 맡기지 말아야 하는지 묻는 일은 이제 신앙의 문제가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정반대의 길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신 길이다(요 1:14). 자기를 높이려던 바벨의 언어 대신, 자기를 낮춰 종의 형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의 언어가 있다(빌 2:6-7).
인공지능 시대에 신앙인이 감당할 참된 저항은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려는 저 오래된 유혹을 알아보고 유한한 존재로서 오늘의 기술과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배우는 일이다. 고인의 음성 파일을 재생할지, 부활을 붙들지, 그 갈림길은 이미 우리 거실에 와 있다.
그리스도인의 데이터 사용은 사라진 뒤에도 나를 남기려는 욕망이 아니라, 오늘의 삶과 사랑을 성실히 증언하는 도구여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바벨의 탑과,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길. 우리는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