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시골 살 때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를 어지간히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아침이나 점심, 저녁때 어른들을 만나기만 하면 때 없이 하는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였다. 전쟁 직후 끼니를 때우기 바빴던 가난했던 시절의 단면이다. 그 후로 많이 한 인사가 ‘별일 없으시지요?’ 였다. 독재정권과 연이은 군사 쿠데타 등 험난한 시대를 통과하는 사이에 숱한 변고와 불확실성이 넘쳤던 세상이라 서로의 안위를 묻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민자들에게도 그런 인사는 익숙했다. 부모님을 두고 온 것이 늘 걱정이었던 까닭에 서울에 전화를 하면 의레껏 첫 인사는 “거기 몇 시에요? 거기 날씨는 어때요?”로 시작한 다음, “별일 없으시지요?”로 이어 갔다.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염려가 묻어 있었다. 전화를 받은 부모님도 설사 그날 병원을 다녀왔거나 몸이 불편해도 “그래 여긴 다 별일 없다. 너희도 별일 없지?”로 전화를 끝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별일 없으시지요?”하고 안부를 묻다가도 이민자들은 새벽에 서울에서 걸려오는 전화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새벽녘 급하게 오는 서울 전화는 대개 부모님의 ‘별일’을 전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니 그렇게라도 서울에 전화할 일이 있었던 게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난해에는 집안의 어른이셨던 누님마저 떠나신 뒤로는 동생들과 처제가 있기는 하나 마음 졸이며 전화를 하거나 새벽에 놀랄 일은 없어졌다.
뉴저지에 온 지 3년이 지나갔다. 그해 여름 LA의 차종환 박사 댁에서 분에 넘치는 송별회를 열어주며 거기 가서 오래오래 건강하라고 축복해주던 50여분의 선후배 가운데 안타깝게도 오인동 박사, 백승배 목사, 김기옥 선생이 부음을 전해오시더니, 곧이어 방송계 원로셨던 김준철, 정진철 선배도 떠나시고…. 지금도 살갑게 안부를 전해주는 후배들은 있지만 내가 “별일 없으시지요?”하며 전화할 그곳 선배들은 다섯 손가락 안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40여년간 LA 한인타운을 오가며 치열하게 부딪치고 뜨겁게 끌어안기도 했던 인간사(人間事)가 가끔은 그리울 때도 있으나 이제는 뉴저지 산골에서 산과 나무와 채소들과 이야기하며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간밤에 소나기가 세차게 퍼붓고 지나간 뒤로 혹시 토마토 줄기가 넘어지지는 않았는지, 고추가 다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오이가 무게에 못 이겨 흙 범벅은 되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지고, 그들이 ‘별일’ 없는 걸 보면 마음을 놓고 돌아온다.
어느 시대인들 완전히 ‘별일’ 없는 세상이 있었을까? 끊임없는 전쟁과 질병, 천재지변과 대형사고, 거기에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풍요 못지않게 걱정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앞으로도 ‘별일’은 계속될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결핍 투성이인 약자이기에 ‘별일’ 없이 좋은 일만 가득한 세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밖에 없다. 월드컵 축구 결승전에서 스페인에 패한 뒤 축구의 신이라는 메시가 하염없이 흘린 눈물이 인상적이었다.
지난달 아내가 낙상사고로 오른팔을 못 쓰면서 한동안 고생을 했다. 다행히 신속하게 응급조처를 하고 치료도 잘 돼 가고는 있으나 때아닌 ‘별일’로 낙상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다 욕실에서 비누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별일 없어요?” 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 일이 있고 나서야 긴 세월 아내의 오른팔이 얼마나 큰 수고를 해왔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교회 동료들과 아이들로부터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시간도 갖게 되었다.
7월 내내 지구가 펄펄 끓었다. 추위는 잘 이겨내는 편이나 더위에는 맥을 못 추는 내게 화씨 10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라니…. 그럴 때면 많은 눈이 내렸고 혹독하게 추웠던 지난겨울을 생각한다.
수상한 세월에도 희망은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어서 그런 거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에게 왕자가 들려준 이야기다. 뉴욕에서 목고를 하고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매주 월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별일 없으시지요?” 하고 전화해 주는 젊은 목사님이 있다. 그 목소리가 내게는 어린 왕자의 음성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