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LG아트센터에서 만난 윤나무는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말도 좋지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타인의 삶을 훔쳐보던 남자가 있다. 감시 대상자의 집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대화를 엿듣는 게 직업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감시하는 이들의 예술과 사랑에 차츰 공감하게 됐다. 그의 삶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달라져 갔다.
지난달 1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 유플러스 스테이지에서 막을 올린 연극 ‘타인의 삶’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동명의 독일 영화를 무대화했다. 1980년대 동독 방첩기관 슈타지의 비밀경찰 ‘비즐러’가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여자친구인 배우 ‘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과정에서 겪는 심리 변화를 담았다.
2007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던 영화는 무대를 통해 한국 관객을 매료시키고 있다. 지난 2024년 11월 개막한 초연에 이어 이번 재연도 관객 평점 9.8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초연에 이어 비즐러를 연기하고 있는 윤나무(40·본명 김태훈)를 지난 28일 LG아트센터 라운지M에서 만났다. 윤나무는 “비즐러는 120% 믿음을 가진 사회주의 신봉자다. 그의 신념이 흔들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몸이, 마음이 그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는 이런 비즐러의 변화를 관객들이 서서히 느끼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비즐러의 변화를 눈에 보이게 연기하면 관객이 오히려 감정이입을 못할 것 같았다”
윤나무는 미세한 몸짓 변화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했다. “처음에는 신문을 굉장히 딱딱하게 읽는다. 그러다가 도청한 시를 몰래 훔쳐 읽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다리를 꼰다. 본인은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수 있다. 그런 작은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대학생 때 원작 영화를 인상 깊게 봤던 그는 이 작품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좋은 원작을 굳이 무대에 올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리고 무대만이 할 수 있는 언어가 있을 거라는 답을 얻었다.
손상규 연출은 원작 영화와 달리 비즐러와 드라이만의 공간을 구분하지 않았다. 6명의 배우는 11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무대 위에 있다. 윤나무는 “비즐러와 그가 도청하는 인물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이자 심리적 거리”라며 “그 거리를 신체의 움직임으로 좁히고 넓히면서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공간을 나누지 않고 한 무대에서 보여준 연극의 언어는 감청실과 피감시자의 공간을 나눈 원작보다 더 큰 생동감을 준다.
‘타인의 삶’은 어찌 보면 배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배우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일을 반복하는 직업이어서다. 윤나무는 2011년 연극 ‘삼등병’으로 데뷔한 뒤 ‘대학로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이후 연극·뮤지컬과 드라마 등을 오가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연기를 하면서 삶이 계속 변모해온 것 같다”며 “어떤 대본을 만나고 캐릭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코드는 공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공감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도 절대 공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도 ‘지금 이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가’다. “1984년 동독 이야기를 왜 2026년에 들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언제든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는 “‘타인의 삶’은 내가 몰랐던 내 마음속 선한 의지가 무엇인지, 지금까지 접한 문학이나 음악 혹은 공연이 삶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며 “시대를 넘어 인간의 삶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공연은 9월 1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