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환전 규모가 19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한 가운데 29일 서울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29일 오후 공항철도 서울역 인근의 신한은행 환전 점포는 엔화를 바꾸려는 고객들로 하루 종일 붐볐다. 일본 후쿠오카 여행을 앞둔 직장인 문모(33)씨는 “평소 2박 3일 여행이면 3만 엔 정도 환전했는데, 이번에는 엔화(가치)가 많이 떨어져서 돈이 남으면 다음에 쓰자는 생각으로 평소보다 두 배 정도 바꿨다”고 말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달러 대비 엔화 약세가 이어지면서 일본 여행 수요가 늘어 환전이 증가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환율 반등을 기대한 환테크 목적의 엔화 환전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원-엔 환율이 100엔당 800원대로 내려오면서 엔화 환전 규모가 1년7개월 만에 최대를 기록했다. 이날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에 따르면 이달 1~27일 원화를 엔화로 환전한 금액은 315억 엔(약 2814억원)으로, 월 기준 규모로 지난 2024년 12월(322억 엔) 이후 가장 많았다. 올해 누적 환전액은 1783억 엔으로 지난해 연간 환전액(2637억 엔)의 68%에 달한다.
김주원 기자
엔저 장기화에 엔화를 저가에 사두려는 예금 수요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 27일 기준 5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은 9781억 엔으로, 이달 들어 693억 엔 증가했다. 다만 지난 1, 2월 각각 1조 엔을 웃돌았던 것과 비교하면 줄었다. 장기 보유보다는 여행·출장을 앞둔 환전이나 단기 매수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원화와 엔화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심화하면서 환전 수요를 자극한 것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그동안 원화와 엔화는 미국 금리와 국제유가 등 대외 변수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달 들어 원화는 강세를, 엔화는 약세를 보이며 흐름이 갈렸다. 원화는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에 따른 자금 유입과 반도체 수출 호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강세를 나타낸 반면, 엔화는 미·일 금리 차와 일본의 확장재정 기조, 고유가에 따른 무역수지 부담 등으로 약세를 이어갔다.
실제 엔-달러 환율은 지난 23일 달러당 163.986엔까지 올라 약 40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이날도 163.546엔(오후 3시 30분 기준)으로 높은 수준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원-엔 환율은 이날 100엔당 884.10원(오후 3시 30분 기준)까지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30~31일 일본은행(BOJ)의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앞두고 엔저 흐름이 계속 이어질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31년 만에 최고 수준인 연 1%로 올린 만큼 이번에는 동결 전망이 우세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은 최근 BOJ가 금리 인상 효과를 지켜본 뒤 연말 추가 인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다만 엔저가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이 금리 인상이나 외환시장 개입에 나서더라도 재정 건전성 우려와 에너지 수입 부담 등 구조적 요인으로 엔화 약세를 되돌리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김유미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도 “달러 강세가 먼저 진정돼야 하는 데다 BOJ도 내수 경기 부담으로 공격적인 긴축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며 “엔화 강세가 구조적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