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李之菡·1517~1578·사진)은 한산 이씨로 목은 이색의 후손이어서 가문에 대한 긍지가 컸다. 아버지는 오래전 증조부가 연산군 폐비 사건에 관련된 것이 연좌되어 박해를 받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이지함은 서경덕에게 배우다가 형 이지번(李之蕃)에게 배웠다는데, 그가 쌍둥이 형제였다는 점에서 형에게서 배웠다는 것이 좀 미심하다. 이지번은 훗날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아버지이니 대단한 벌족이었다.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세상살이에 염세적이었던 이지함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마포 만리동고개에 토담집(土亭)을 짓고 살며, 나라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잘 맞추었다. 그의 학문이 소문나자 조정에서는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그를 음사(蔭仕)로 채용했는데 벼슬이 6품이라는 말을 듣자 가지 않고 개천에 가서 귀를 씻었다. 그럼에도 주위의 권고가 간곡하여 다시 벼슬에 나갔는데, 첫 부임지가 포천 현감이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상소문(선조 19년 10월 1일)에, “제가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세 분인데, 율곡(李珥)과 우계(成渾)와 이지함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산 현감으로 전직된 그는 백성의 물산에 관심을 두고 다스리니 모두 그를 흠경했다. 토정은 생업 장려와 자원 개발을 주장하면서, 광산노동자의 반란이 두려워 광산 개발을 금지하던 국법에 저항했다. 그는 재리(財利)가 덕이라고 여겨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산 지도를 작성하여 민생을 살폈다. 말하면 그는 조선조의 정치경제학자였다.
인생의 길흉화복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학문과 경험을 토대로 『토정비결』을 지었는데, 적덕(積德)과 금기와 방위(方位)에 관한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세는 그의 정치적 식견과 치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7월에 물가에 가지 말라”는 금기만 내세우며 그를 혹세무민하는 술사로 보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