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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와 '김부장' [이지영의 문화난장]

중앙일보

2026.07.29 08:14 2026.07.2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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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스포츠부국장

이지영 문화스포츠부국장

감동 대신 쾌감으로 극을 끌고간다. 박스오피스 1위 영화 ‘호프’와 시청률 1위 드라마 ‘김부장’. 장르도, 배경도, 주제도 다른 두 작품의 흥행 문법이 놀랍도록 닮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과 속도감을 앞세운, 이른바 ‘도파민 폭발’ 콘텐트다.

나홍진 감독은 10년 만의 신작 ‘호프’의 초반 1시간가량을 영문 모를 추격전으로 채웠다. 쫓는 대상도, 쫓기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숨 돌릴 틈 없는 서스펜스를 몰아친다. 맥락은 모르지만 재미는 확실하다. 봉준호 감독이 정의한 대로 “쾌감과 폭주의 롤러코스터”다.

‘도파민 폭발’ 닮은꼴 흥행 비법
자극-보상 반복되는 서사 구조
사연 없는 악당…응징 대상일뿐
감동 대신 쾌감…모성애도 밋밋
영화 ‘호프’. 서사보다 스펙터클과 긴장감이 흥행 비결로 통했다.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액션과 볼거리로 승부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호프’. 서사보다 스펙터클과 긴장감이 흥행 비결로 통했다.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액션과 볼거리로 승부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웹툰 원작의 ‘김부장’ 역시 매회 펼쳐지는 사이다 액션이 흥행 비결이다. 주인공 김부장(소지섭 분)을 비롯한 아저씨 3인방의 주먹이 수십 명의 악당을 순식간에 제압한다. 타격감 넘치는 액션은 마치 게임 영상을 보는 듯 압도적이다.

모호한 외계인 서사로 해석 논란 자극
이들 콘텐트는 관객을 붙잡아두기 위해 짧고 강한 자극을 쉬지 않고 만들어낸다. 감동의 깊이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시청자의 각성을 유지하느냐로 승부하는 것이다.

서사 구조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서사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고전적 서사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순으로 진행된다. 관객은 결말의 거대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초중반의 답답함, 이른바 ‘고구마’라 불리는 시련의 구간을 인내해야 한다. 고통의 서사가 깊을수록 결말의 환희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프’나 ‘김부장’의 서사는 ‘자극-응징-보상’이 반복되는 주기적 파동에 가깝다. ‘가해자=악’ ‘응징=선’이라는 단순화된 구조를 통해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성장 서사도 생략됐다. 전통적 서사에서 주인공은 좌절과 실패를 겪으며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 나간다. 처참한 실패와 혹독한 수련을 거쳐 마침내 악당을 쓰러뜨리는 영웅 서사의 전형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호프’와 ‘김부장’의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완성된 무적의 능력자다. 잠깐의 시련마저도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다음 액션을 위한 연결 장면으로 쓰인다.

악당의 서사 역시 최소화됐다. ‘김부장’의 빌런 주강찬(주상욱 분) 회장은 살인과 고문을 서슴지 않을 만큼 무자비하며, 사적 복수를 위해 북한과도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괴물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응징의 대상으로 그려질 뿐이다.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호프’의 경우 평화롭던 호포항에서 대학살극을 펼친 외계인의 서사가 영화 종영 직전 등장한다. 헐리우드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연기하는 두 외계인이 “게르투의 이름을 걸고 당신의 아들을 찾아내겠다. 내 심장이 칼리를 부활시킬 것” “지난 꿈 속에서 쿠얼을 뵈었다. 운명을 바꿔라” 식의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다. 하지만 이를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한 장치로 보긴 힘들다. 의도적으로 해석 논란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의 마음까지 붙들어보겠다는 또 다른 자극이다.

이러한 문법의 작품들이 동시에 흥행 정상에 오른 것은 단순히 창작자들의 취향 변화 때문이 아니다. 숏폼 플랫폼에서 강화된 흥행 공식이 레거시 미디어로 스며든 결과다. 1.5배속 시청과 요약본 소비가 일상화된 시대, 인물과 배경을 소개하고 갈등을 쌓아가는 ‘빌드업’의 시간이 거침없는 전개와 화려한 볼거리로 대체된 것이다.

드라마 ‘김부장’. 서사보다 스펙터클과 긴장감이 흥행 비결로 통했다.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액션과 볼거리로 승부한다. [사진 SBS]

드라마 ‘김부장’. 서사보다 스펙터클과 긴장감이 흥행 비결로 통했다.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액션과 볼거리로 승부한다. [사진 SBS]

이들 콘텐트가 관객 내부에서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스펙트럼 역시 재편되고 있다. 연민이나 죄책감, 씁쓸함과 깊은 성찰 등 맥락과 인내가 필요한 감정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긴장과 공포, 분노와 통쾌함 등 도파민 효과를 증폭시키는 감정만 집중적으로 자극받는다.

심지어 모성애·부성애마저 감동 코드가 되지 못한다. ‘호프’에서 외계인이 마을을 초토화시킨 이유는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에 공감할 틈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김부장’도 딸을 구하기 위한 부성애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시청자의 눈물을 끌어내지는 않았다. ‘김부장’의 부성애 역시 가슴 뭉클한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응징을 작동시키는 스위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도 ‘쾌락’ 사회
‘호프’와 ‘김부장’의 흥행은 서사 소비의 시대에서 반응 소비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상이다. 이야기를 이해하기도 전에 먼저 흥분하도록 만들어야 하니, 순간적인 감각 자극과 본능적인 카타르시스가 콘텐트 경쟁력의 핵심이 된다.

물론 반작용도 있다. 강한 자극에 지친 이들이 느린 서사와 깊은 몰입을 주는 콘텐트에 눈을 돌린다. 올 상반기 연극 매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텍스트힙’ 바람에 힘입어 지난해 20대의 독서율이 늘어난 것 등이 그런 사례다. 하지만 이를 대세로 보긴 어렵다. 콘텐트 업계에서 연극 시장은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고, 성인 전체 독서율은 해마다 줄고 있다.

오늘날 ‘도파민 콘텐트’의 득세는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SF 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 예견했던 미래와도 닮아있다. 2540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고 인간의 고뇌와 사랑·슬픔 등을 익힌 이는 문명 세계에서 벗어난 ‘야만인’ 존이었다. 헉슬리가 상상한 디스토피아는 고통이 넘치는 세상이 아니라 피상적인 쾌락에 길들여진 사회였던 것이다.



이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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