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켜졌던 반등의 희망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다. 29일 장 초반 상승세를 보이던 코스피와 코스닥 지수는 반도체주 투매에 휩쓸리며 추락했다. 코스피가 장중 5200선까지 밀리며, 두 시장 모두에서 연이틀 서킷브레이커(거래 일시 중지)가 발동되는 초유의 장세가 펼쳐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일보다 5.98% 내린 5663.24에 마감했다. 장중 한때 12% 넘게 급락하며 5262.77까지 내려앉았지만,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며 낙폭을 일부 만회했다. 장중 고점과 저점 차이는 965.75포인트로 역대 두 번째로 컸다. 코스닥도 6.12% 하락한 662.68로 거래를 마쳤다.
정근영 디자이너
거래소는 이날 오전 10시55분(코스피)과 10시56분(코스닥)에 프로그램 매도호가 효력을 5분간 정지하는 매도 사이드카를 각각 발동했다. 이어 낮 12시19분 코스닥, 12시32분 코스피에서 서킷브레이커를 가동했다. 이날 기관이 3조1604억원을 순매수했지만 개인(1조9701억원)과 외국인(1조2282억원)의 동반 매도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달 들어 증발한 코스피 시가총액은 2116조3305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경상 국내총생산(GDP) 2676조6748억원에 버금가는 숫자다. 7월 코스피 월간 등락률은 -33.19%로 역대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10월(-27.25%)보다 더 큰 하락 폭이다.
이날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발표한 SK하이닉스가 장중 19% 넘게 하락하고, 삼성전자도 장중 14%대로 밀린 영향이 컸다. 간밤 미국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주가 동반 급락한 것도 매도 심리를 키웠다.
정근영 디자이너
불똥은 아시아 증시 전반에 번졌다. 대만 가권(-3.76%), 일본 닛케이225 지수(-1.49%)도 하락했지만, 코스피 낙폭이 유독 컸다.
강진혁 신한투자증권 선임연구원은 “SK하이닉스의 2분기 실적이 시장 기대에 못 미쳤고, 콘퍼런스콜에서 주주환원 정책 등에 대한 실망감이 더해졌다”며 “미국·이란 협상 불확실성과 (현지시간 30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앞둔 경계심도 투자 심리를 위축시켰다”고 분석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긴급 회의를 개최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의 개인별 투자 한도를 총 투자금의 20%로 제한하는 규제를 즉각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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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외국인 3조대 ‘항복 매도’…기관은 3조 사들여
글로벌 트레이딩 플랫폼 이토로의 조시 길버트 수석연구원은 “SK하이닉스가 올해 설비 투자를 40조원 후반대로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주주환원 정책과 장기 공급계약 가격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투자자의 불안감을 키웠다”고 짚었다.
증권가에서는 당장의 실적보다 향후 업황에 대한 눈높이가 낮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래에셋증권은 이날 SK하이닉스 목표주가를 420만원에서 280만원으로 33% 하향 조정했다. 김영건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중국의 노광장비 개발에 대한 우려로 시장의 관심이 실적보다 업황의 수익성 지속 여부로 옮겨가고 있다”면서도 “최근 주가 하락은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비해 과도하다”고 평가했다.
외신은 이번 급락을 AI 반도체 업황에 대한 기대가 재조정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장 기대에 못 미친 SK하이닉스 실적과 중국 반도체 기술 추격, 메모리 공급 과잉 우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규제 시행을 앞둔 차익실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시장의 공포가 과도하다는 평가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윤준원 DS자산운용의 펀드매니저도 블룸버그에 “사람들이 마치 도망치는 것 같다”며 “특히 개인투자자의 이러한 대규모 매도세는 이해하기 어렵다. 기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이는 비이성적인 매도”라고 했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사이드카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현재 시장은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기 어렵다”며 “증권시장안정펀드와 공매도 금지 등 투매와 쏠림을 제어할 수 있는 한시적 비상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