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참전용사인 호세 로하스 마린이 지난 28일 오전 앰베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중공군이 떼로 몰려왔는데 참호 안에선 총을 쓸 수가 없으니 칼로 찌르며 싸웠어요. 달리 도리가 없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6·25전쟁 유일의 남미 참전국인 콜롬비아 참전용사 호세 올메도 로하스 마린(96)의 73년 전 기억은 선명했다. 그는 1953년 초반 경기 연천 ‘불모고지(Old Baldy, 266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전쟁 막바지 한 뼘이라도 밀고 올라가기 위해 미군·유엔군·국군과 북한군·중공군은 하루 이틀을 두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국가보훈부가 주관한 지난 27일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행사 참석차 한국에 온 그를 28일 앰버서더 서울 풀만호텔에서 만났다.
로하스 마린은 “꼭대기가 완전히 털이 없는 머리같이 생긴 곳”으로 불모고지의 독특한 지형을 기억하고 있었다. 콜롬비아 부대원들이 ‘엘 칼보 고지’라고 불렀던 곳이다. 그는 “중대를 두 개로 나눠 한쪽은 고지 위쪽, 다른 쪽은 터널(참호)을 통해 전투를 벌였다. 나는 터널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참호 안에는 당시 탄약·무기 등 핵심 보급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곳을 중공군에게 내준다는 건 유엔군에겐 뼈아픈 패배가 될 수 있었다.
좁은 참호 안에선 적군과 아군이 뒤엉켜 유혈이 낭자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로하스 마린은 “우리 임무는 중공군을 일자형 참호 바깥으로 몰아내고 그곳을 차지하는 것이었다”면서 “중공군이 떼로 몰려오는데 자동소총이나 기관총이 있어도 참호 안에 무더기로 몰려오니 총을 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총검술을 쓸 수밖에 없었다”면서 “‘바요네타 칼라다(Bayoneta calada)’라고 부르는 (착검한) 칼로 찌르며 싸우는데 사상자가 많았다”라고 기억했다.
그가 참여한 혈투에서 콜롬비아군 다수가 전사했다. 대신 중공군에게도 치명적 타격을 입히며 유엔군에겐 승리를 안겼다. 로하스 마린은 “그 이후로 사람들이 우리를 ‘참호의 악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불모고지 전투로 맹위를 떨친 콜롬비아군은 한국전쟁 기간 연인원 5100명이 참전해 213명의 전사자를 냈다.
호세 올메도 로하스 마린은 1951년 콜롬비아 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사진 콜롬비아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상 박물관
그가 한국전쟁에 자원해 참전했을 때는 1951년, 세상에 두려울 게 없던 스물한살의 나이였다. 빈농의 아들이던 그는 군 복무 중 파병 공고문을 보고 덜컥 자원했다. 로하스 마린은 “그때만 해도 전쟁은 영화 속에서 보던 참상이었다”며 “온갖 피와 시신 등을 떠올리기보다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니 좋은 것이란 생각에 참전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처음 겪는 한국의 혹한도 다국적군에겐 어려움의 대상이었다. 로하스 마린은 “1952년 12월 폭설이 내렸는데, 눈이라는 것을 처음 봤다”고 말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손가락, 귀, 팔, 다리까지 잘라냈다. 그 역시 다리에 피가 돌지 않아 야전병원에서 경유 난로를 옆에 두고 치료를 받았다. 그는 다른 전투에도 다수 참여해 수류탄 파편에 맞는 등 부상을 입기도 했다.
불모고지 전투는 큰 승리로 끝났지만, 지옥도에 가까운 ‘그날의 참호’를 떠올리는 건 참전용사들에겐 상흔 그 자체였다. 그가 1953년 고국으로 돌아간 뒤 단 한 번도 한국에 올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에 주콜롬비아 한국대사관을 통한 국가보훈부의 초청을 받고서야 그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27일 유엔 참전국 감사만찬에서 호세 올메도 로하스 마린(왼쪽)에게 평화의 사도메달을 수여했다. 그는 국가보훈부가 주관한 '유엔참전용사 등 재방한 초청사업'으로 한국에 왔다. 사진 국가보훈부
로하스 마린은 “너무 힘든 기억”이라면서도 “오랜만에 한국에 와보니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고민 없이 한국행에 자원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