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내 코르티스.” 인기 아이돌 그룹 코르티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다 뒤늦은 전성기를 맞은 정일영(65) 교수의 영상에 올라온 댓글이다. 연예인이 아닌데도 그만큼 재밌다는 뜻이다. “국민연금 받는 분 중 제일 재밌다”, “이런 단단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댓글이 이어진다. 요즘 젊은 세대가 즐겨 보는 콘텐트의 주인공은 화려한 인플루언서가 아니다. 60대 아저씨에서 90대 할아버지까지. 때로는 아빠처럼 친근하고 때로는 인생 선배가 되어주는 ‘무해한 어른’들이다.
정일영 인하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는 최근 인기 유튜브 채널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한다. 사진 tvN 유퀴즈온더블록 캡처
거침없는 입담 뒤 60년 ‘인생 내공’
정 교수는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화제를 몰았다. 프랑스어 전문가로 초대된 그는 “언어는 기세다”라든가 “전력을 다하고 안 되면 남 탓해라”는 멘트로 보는 이에게 웃음과 공감을 안겼다. 해당 영상은 관련 숏폼을 포함해 누적 조회 수 1억 회를 기록했고, 인기를 몰아 최근에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다.
2024년 유튜브 '침착맨'의 프랑스어 특강 편에 출연한 정 교수의 영상은 누적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했다. 사진 유튜브 '침착맨' 캡처
정 교수의 매력은 거침없는 입담만이 아니다. 젊은 세대는 30년 동안 시간강사로 일하며 자신만의 ‘버티는 법’을 깨쳐온 그의 인생 태도에 더 공감하고 있다. 교수 임용에 번번이 실패한 뒤에도 1년에 논문 8편을 쓰고, 지금까지 40여 권의 책을 펴내며 자신을 단련해왔다. “버텨보라”는 그의 말에 “65년 산 분이 버텨보라면 버텨볼게요”라는 댓글이 달리는 이유다.
‘생일에 아들한테 갤럭시 워치 선물 받는 법’ 영상으로 주목받은 김종구(67) 씨의 유튜브 채널도 비슷하다. ‘출근날 늦잠 잤을 때 대처법’, ‘아내에게 낚싯대 산 걸 들켰을 때’ 같은 엉뚱한 상황을 특유의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풀어내며 팬층을 넓혔다. 나이 때문에 재취업이 쉽지 않아 유튜브를 시작했다는 그는 화려한 연출이 아니라 오랜 세월 쌓인 삶의 경험과 재치로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고 있다.
'조기축구 형님들에게 예쁨받는 법' '비상금 걸렸을 때' 같은 강의 영상에 무신사, 모나미, 하나투어 등 브랜드 계정의 댓글이 달린다. 홍보 관계자들이 관심있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사진 김종구 채널 캡처
브랜드들도 이들의 영향력에 주목하고 있다. 정 교수는 최근 프랑스 자동차 브랜드 푸조의 앰배서더로 발탁됐고, 그가 출연한 숏폼 영상은 공개 하루 만에 조회 수 120만 회를 기록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정 교수와의 협업이 프랑스 브랜드의 정체성과 가치를 보다 친근한 방식으로 전달한 계기가 됐다”는 평이다. 김종구 채널은 브랜드 공식 계정이 일부러 재치있는 댓글을 남기는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트)’ 놀이터가 됐다. 삼성전자와 협업한 다섯 번째 영상에서는 ‘갤럭시워치 8로 삐진 아내의 마음을 풀어주는 법’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특유의 캐릭터를 살린 덕분에 광고 역시 하나의 콘텐트로 받아들여졌다는 평가다.
“우리 아빠·엄마 같다”…. 평범한 가족 서사 통했다
요즘 시니어 콘텐트의 공통점은 자녀 세대가 카메라를 든다는 점이다. 부모의 일상과 캐릭터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이 과한 연출 없이 꾸밈없는 순간을 기록하면서, 진정성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최근 20대 사이에서 인기인 시니어 크리에이터 채널들. 왼쪽부터 원모씨, 마포구 원여사, 이구 할아버지. 사진 각 SNS 갈무리
“아 회사 가지 마까(말까).”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한마디로 화제가 된 유튜브 채널 ‘원모씨’도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채널은 1957년생 정원모(69) 씨의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유행어인 ‘거제 야호’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출근 아침의 브이 로그를 올리기도 한다. 정교한 기획도, 화려한 편집도 없다. 그런데 댓글 창은 “우리 아빠 같다”, “나이 들어도 회사 가긴 싫은 거구나”는 Z세대 반응으로 가득하다.
‘마포구 원여사’ 채널은 사위가 카메라를 들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늙은이들이 카페 오는 거 눈치 없다고 하네요”라며 자조 섞인 내레이션으로 동네 편의점을 방문하는 영상에는 “우리 엄마도 이런 생각할까 봐 열 받는다”, “눈치 보지 마세요”라는 응원 댓글이 3000여개나 달렸다. 1929년생 할아버지와 1997년생 손녀가 만드는 ‘이구 할아버지’도 인기가 높다. 97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능숙하게 집밥을 차리고, 손녀에게 밥 한술이라도 더 권하는 모습은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얻고 있다. 손주가 기록한 가족의 일상이지만, 시청자에게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편적인 풍경이 된다.
‘꼰대’ 아닌 무해한 어른
시니어 크리에이터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조부모(grandparent)와 인플루언서(influencer)를 합친 ‘그랜플루언서(granfluencer)’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박막례(79), 유튜버 밀라논나(74)가 이미 길을 열었다. 다만 지금의 흐름은 결이 조금 다르다. 특정 콘셉트나 전문성으로 승부하기보다, 생활 그 자체를 그대로 내보이는 ‘무기 없는 콘텐트’가 오히려 통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핵심 원천은 ‘무해함’이다. 젊은 세대가 시니어 세대에게 흔히 붙여온 ‘꼰대’ 이미지는 가르치려 들고, 판단하고, 위계를 세우는 태도에서 비롯됐다. 반면 새롭게 부상한 시니어 인플루언서들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유행하는 밈을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내놓고, 조언해도 강요하지 않는다. 무해함이 반전 매력이 되는 지점이다.
최근 '이구할아버지' 채널에서는 20대 구독자의 고민을 듣는 라디오 콘텐트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사진 이구할아버지 채널 갈무리
이들의 메시지는 젊은 세대에게 훈계가 아닌 위안으로 다가간다. 최근 이구 할아버지는 20대 팬들의 요청으로 고민과 사연을 들어주는 콘텐트를 선보이고 있다. 취업과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위안을 받는다. 또래에게서는 얻기 어려운,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안정감이다.
평소 시니어 콘텐트를 즐겨본다는 회사원 오민아(28)씨는 “때론 귀엽고, 때론 우리 아빠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난다”며 “꾸며낸 캐릭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주는 데서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황진미 문화평론가는 “요즘 뜨는 시니어들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젊은 세대와 눈 맞춤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서 “경제적으로 호시절을 겪은 부장님의 얘기는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생활로 삶을 버텨온 이들의 이야기는 상호 연민과 연대로 받아들여진다 ”고 분석했다.
b.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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