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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

Los Angeles

2026.07.2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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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藥有鍼無).”
 
현대 한의학의 큰 스승이신 구당(灸堂) 김남수 선생님 밑에서 침뜸을 배우던 젊은 시절, 이 말씀을 자주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침은 약재와 달리 재료비가 거의 들지 않으니 치료비가 싸다는 뜻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 역시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수많은 환자의 아픔을 마주하다 보니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 짧은 말속에는 돈이라는 세속의 저울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숭고한 의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구당 선생님께서 1990년대 초 강원도 산골을 여행하실 때의 일이다. 우연히 한 가게 주인의 극심한 허리 통증을 침 치료 한 번으로 씻은 듯 고쳐주셨다. 기적 같은 효험에 놀란 주인은 선생님의 손을 붙잡고 눈물로 애원했다. 사경을 헤매는  안쪽 마을 최부자집 부인을 살려달라는 간청이었다.
 
최 씨의 부인은 심한 빈혈과 설사, 장 출혈로 뼈만 남은 채 쇠약해져 있었다. 병원에서도 손을 놓았고,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고 했다. 절망에 빠진 남편 최 씨는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제 아내만 살려 주신다면 땅 수천 평이라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그 약속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오직 꺼져가는 생명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환자의 발등 위 충양(衝陽)혈을 짚어보니 미약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었다. 아직 생명의 불씨가 남았다는 신호였다.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곡지(曲池), 족삼리(足三里), 중완(中脘) 등 몸의 기혈과 오장육부를 돕는 혈 자리에 침을 놓고 뜸을 올렸다. 이튿날 거짓말처럼 설사가 멎고 열이 내렸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스스로 미음을 먹기 시작하더니, 점차 몸을 일으켜 마당을 밟았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웠던 집안에 웃음이 돌아왔고, 소문을 들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사랑채는 날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단 하루만 묵고 떠나려던 선생님은 밀려드는 환자들을 외면하지 못해 닷새를 머무셨다. 그런데 부인의 병세가 완연히 좋아질수록, 전 재산이라도 내놓겠다던 남편 최 씨의 얼굴빛은 어두워져만 갔다. 마지막 밤, 선생님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최 씨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최 씨는 어둠 속에서 거듭 “죽일 놈, 참 죽일 놈…” 하고 자책하듯 읊조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튿날 새벽 조용히 짐을 싸서 방 안에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藥有鍼無)’는 글을 남기고 마을을 떠나셨다. 이 말은 돈이 없는 사람에게나 있는 사람에게나 인생의 거대한 ‘화두(話頭)’이기에….
 
사실 최 씨가 원망했던 대상은 선생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아내가 죽어갈 때는 땅 수천 평도 아깝지 않다고 맹세했건만, 막상 아내가 살아나 건강을 되찾자 그 아까운 땅을 내주어야 한다는 탐욕과 인색함이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최 씨는 은혜를 잊고 흔들리는 자신의 간사한 마음을 밤새도록 사정없이 책망했던 것이다.
 
인간은 위급할 때는 무엇이든 내어놓을 듯 애원하지만, 고통의 강을 건너고 나면 은혜의 무게부터 달아보려 한다. 그러나 한 생명을 구하고 모진 고통 속에서 일상을 되찾아 주는 의술의 가치를 어찌 물질의 잣대로만 계산할 수 있겠는가.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는 말은 침 치료가 값어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고귀한 가치를 세상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역설이다. 침 한 자루의 값은 미미할지라도, 막힌 혈 자리를 짚어내는 학문적 깊이와 수십 년의 임상 경험, 환자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긍휼(矜恤)의 마음은 결코 가볍게 매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논어에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하여 이익을 보거든 먼저 의로움을 생각하라 했다. 의료가 물질만을 좇는 순간 환자는 이윤을 남기는 수단이 되고 인술(仁術)은 장사가 된다. 그렇기에 의자(醫者)는 날마다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캘리포니아주에서 65세 이상은  메디케어 등 보험 혜택을 통해 큰 비용 부담 없이 침과 뜸 치료를 받고 있다. 고단한 어르신들이 돈 걱정 없이 몸과 마음을 치유 받을 수 있는 환경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온다.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 이 말은 환자들과 함께한 시간이 쌓이고, 그 뜻을 곱씹을수록 더욱 깊은 진리로 다가온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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