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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가”…초대형 디스플레이에 새긴 김 크리스틴 선의 질문

중앙일보

2026.07.30 00:20 2026.07.30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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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31일 개막하는 'MMCAx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의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31일 개막하는 'MMCAx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의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동굴에서 바위가 굴러 내리는 듯한 소리와 장면이 장대한 음악과 함께 반복된다. 세로 8.1m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흑백 애니메이션이다. 윗부분이 휘어진 곡면 OLED 디스플레이가 쏟아져 내릴 듯 압도감을 준다. 바닥과 벽엔 움직임이나 충돌을 나타내는 만화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진동하는 저음이 그리스 비극처럼 장중하다.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부딪혀 부서지고 마는 인간의 숙명처럼.
자신의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을 올려다 보고 있는 김 크리스틴 선(가운데). 권근영 기자

자신의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을 올려다 보고 있는 김 크리스틴 선(가운데). 권근영 기자

30일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 김 크리스틴 선(46)의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이 층고 16.6m 홀인 서울박스를 채웠다. ‘MMCA×LG OLED 시리즈 2026’으로 선정된 그의 첫 국내 미술관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갈등과 소모적인 대립이 지속되며 온라인상에서 증폭되는 오늘날의 세태를 은유하는 제목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세상은 싸움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은 완고한 바위 같다. 끊임없이 싸우고 논쟁해도 결국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품 앞의 김 크리스틴 선.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의 영문 제목을 이루는 여섯 단어와 이에 대응하는 미국 수어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와 벽화로 나오고 있다. 권근영 기자

작품 앞의 김 크리스틴 선.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의 영문 제목을 이루는 여섯 단어와 이에 대응하는 미국 수어 이미지가 애니메이션와 벽화로 나오고 있다. 권근영 기자

김 크리스틴 선은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미술가다. 198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농인 공동체의 경험이 녹아들어간 그의 작품은 접근성과 소통의 문제를 다루기에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다. 그는 소리를 청각적 현상만이 아니라 권력·제도·규범과 긴밀하게 연결된 사회적 체계로 보며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 발화와 청취의 조건은 어떻게 형성되고 분배되는가’라는 조건을 탐구해 왔다.
지난 4월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그는 “청각 장애인의 삶은 메아리로 가득하다. 어딜 가든 통역사를 거쳐야 대화할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본지 4월 17일자 20면〉 에듀케이터로 일했던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지난해 연 회고전이 올해 미니애폴리스 워커 아트센터로 순회하는 등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의 미술전문지 ‘아트 리뷰’가 매년 집계하는 ‘파워100’에서 지난해 세계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4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지하 1층 서울박스를 채운 김 크리스틴 선의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지하 1층 서울박스를 채운 김 크리스틴 선의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맞아 29일 한국에 온 그는 “조부모님이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면서 가족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셨다. 지난주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주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미국 수어(American Sign LanguageㆍASL)로 하는 그의 말은 미국에서 온 ASL 통역사와 영한 통역사의 2중 통역을 거쳤다.

초기작은 종이에 목탄으로 ASL의 손동작을 그린 드로잉. 손이 얼굴의 어디를 만지느냐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는 걸 보여주며 수어의 시각성을 강조했다. 이번에도 서울박스 벽면과 바닥에 그의 흑백 드로잉을 초대형으로 확대한 이미지를 붙였는데, 손동작이 아니라 손과 얼굴이 충돌 지점이나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만화의 모션 라인을 닮아 귀여운 데가 있다. 그림에 좀처럼 색깔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내 작품이 공포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 공포는 제가 청인이 다수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데서 기인합니다. 정보가 구어로 전달이 되고, 말로 하는 언어가 더 우위에 있다고 인식되는 사회입니다. 제가 사는 세계가 저를 위해 설계된 곳이 아니기에 많은 긴장과 소통의 오류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얻은 정보만 가지고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최대한 명확하게, 흑과 백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2013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이어 2016년 베를린 비엔날레, 같은 해 미디어 시티 서울 등으로 널리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된 지금은 더러 작품에 색깔도 들어간다.
“소통에는 많은 신뢰가 오갑니다. 제가 말하는 바가 두 번의 통역을 거쳐 여러분들에게 잘 전달이 되는 건지 아직도 의구심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저는 색을 좀 씁니다. 제 작업에 약간의 모호함을 더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신작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이 보여주는 장중한 비극의 정서에 일말의 희망이 엿보이는 건, 그 자신이 희망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31일부터 11월 29일까지. 무료.



권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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