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다 숨진 A씨(26) 유족과 민주노총 전북본부 등이 지난달 30일 고인이 방사선사로 일한 전북 군산의 한 종합병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민주노총 전북본부
경찰·고용노동부, 동시 조사 착수
전북 군산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20대 방사선사가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다 숨지자 경찰·고용노동부가 조사에 착수했다. 그보다 먼저 퇴사한 전임자도 “죽을 것 같다”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며 AI(인공지능)에 고통을 털어놓은 기록이 공개돼 파장이 커지고 있다.
1일 유족에 따르면 A씨(26)는 대학 졸업 후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약 3년간 일한 뒤 지난 6월 초 군산의 한 종합병원에 계약직 방사선사로 취업했다. 그러나 입사 직후부터 특정 건물로의 반복적인 이동 지시와 번복, 질책, 부서 내 따돌림을 겪었다는 게 유족 측 주장이다. 출근 스트레스로 수면제까지 복용했다고 한다.
A씨는 지난 6월 26일 출근 준비를 하던 중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며 “출근하기 싫다”고 말한 뒤 연락이 끊겼다. 사흘 뒤인 29일 군산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타살 정황이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도대체 A씨가 일하던 병원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5분 안에 식사·양치” “선임보다 먼저 출근”
유족과 동료들이 공개한 자료에는 근로기준법 위반 정황이 담겼다. 근로계약서상 출근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지만, 실제로는 7시 30분까지 출근해 청소와 업무 준비를 해야 했다. 신입은 선임보다 먼저 출근하는 게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엔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 10~25분 안에 식사와 양치를 마치도록 했고, 계약서상 격주 토요일 휴무 조건에도 사실상 주 6일 출근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조기 출근에 대한 보상도 신입에겐 없었다고 한다.
A씨가 생전에 친구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일부 공개됐다. 고인은 “나 걍 그만두려고” “ㅈㄴ 죽고싶음” “스트레스 받아서 맨날 체하고” “방금 개쳐울고 나옴” “진심 개토나올거 같음” “영상 봐달라고 했더니 한숨 쉬고”라고 토로했다.
A씨가 숨지자 “나도 괴롭힘을 겪었다”는 전·현직 직원들의 제보가 잇따랐다. 특히 지난 3~4월 두 달가량 이 병원에서 근무했던 전임 방사선사 B씨(20대·여)는 “이러다 죽겠다 싶어 퇴사했다”고 밝혔다.
B씨는 “신입 직원들은 신관 검진센터와 본관을 오가며 유방 촬영과 의사 초음파 보조 등 업무를 동시에 맡았고, 퇴근 후에도 별도 과제를 부여받아 늦게 제출하면 질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 “업무 중 실수가 발생하면 선임들이 모여 조리돌림했고, 이유를 설명하려 하면 소리를 지르며 ‘핑계 대지 말라’며 무조건 ‘죄송합니다’만 하라고 강요했다”고 했다.
사생활 감시와 성희롱 의혹도 제기됐다. B씨는 한 선임이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방사선을 맨날 맞아 나중에 임신 못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이를 팀장에게 알렸지만 외려 “네가 너무 쉽게 보여서 남자애들이 그런 것 아니냐”는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병원 “고인 애도…괴롭힘은 없어”
B씨가 공개한 AI와의 대화 기록에는 당시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AI에게 ‘오늘도 힘낼 수 있는 말을 해줘. 죽을 거 같아 정말’ ‘내일도 버틸 힘을 줘’ ‘곧 퇴근 시간이야. 하나도 기쁘지가 않아. 집에 가다가 차에 치여버렸으면 좋겠어’라고 호소했다.
A씨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B씨는 지난달 중고 거래 앱에서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제가 그만두고 다음으로 들어온 분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제가 퇴사하지 않았으면 그 선생님이 입사할 일도 없었을 것 같고 제가 용기가 없어 (악습을) 끊어내지 못하고”라고 하소연했다.
A씨 유족과 민주노총 전북본부 등은 지난달 30일 해당 병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인은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출근을 두려워했다”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고용노동부 군산지청과 전북경찰청 광역범죄수사대는 병원 전·현직 직원 등을 상대로 근로기준법 위반과 직장 내 괴롭힘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해당 병원도 외부 노무사 2명을 선임해 자체 조사에 나섰다. 병원 측은 “현재까지 직장 내 괴롭힘은 확인되지 않았다”며 “혐의 유무와 별개로 직원이 사망한 만큼 애도 기간을 갖고 별도 성명 없이 신중히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유족의 아픔을 생각해 수사에 적극 협조하라’는 병원장 지시에 따라 관련 폐쇄회로TV(CCTV) 영상과 자료를 모두 제출했다”며 “고용노동부·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조치하겠다”고 했다.
“한 달 근무, 사망 간 인과관계 규명” 쟁점
A씨 근무 기간이 25일에 불과해 직장 내 괴롭힘과 사망 간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게 경찰 수사의 핵심 쟁점으로 꼽힌다. 현재까지 입건된 피의자는 없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참고인 조사를 통해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단계”라며 “고인의 상태와 기존 질환 유무, 주변 정황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원칙대로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6월 경기 광주시 한 병원에서 근무했던 20대 간호사가 ‘태움’이라 불리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일 X(옛 트위터)에 “태움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끔찍한 폭력”이라며 철저한 진상 규명과 엄정 대응을 지시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 전화 ☎109 또는 자살예방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