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대신 무릎을 꿇었다. 초연 100주년을 기념해 예술의전당에서 지난주 공연된 푸치니 대표작 ‘투란도트’(사진) 얘기다. 구혼자에게 퀴즈를 내고 틀리면 죽여 버리는 ‘남혐’의 원조, 얼음공주 투란도트는 칼라프 왕자의 키스가 아닌 헌신에 굴복한다.
매년 한 작품씩 예술의전당이 직접 제작하는 오페라이기에 관심이 집중됐다. 2023년부터 로열 오페라 프로덕션 ‘노르마’ ‘오텔로’ 리바이벌로 세계적 수준의 무대를 소개하고 지난해 호주 제작진이 참여한 창작오페라 ‘물의 정령’을 선보이며 글로벌시장 진출도 예고했으나, 올해는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로 방향성을 틀었다.
지휘 로베르토 아바도, 소프라노 에바 프웡카를 제외하곤 전원 한국인으로 꾸린 프로덕션이지만 몇년새 프랑코 제피렐리 버전 등 해외 인력을 동원했던 ‘초대형 투란도트’들에 비해 손색없었다. 높은 곳에서 황금으로 둘러싸여 서서히 드러나는 황제의 옥좌, 철갑을 두른 투란도트가 머무는 거대한 함선 형태의 요새도 강렬했다.
관전포인트는 테너 백석종의 국내 데뷔. 로열 오페라·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이체 오퍼 베를린 등 세계 최고 극장에서 러브콜을 받는 그의 ‘네순 도르마’를 듣기 위해 객석은 일찌감치 전석매진됐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따듯하면서도 든든한 심지가 느껴지는 가창은 명불허전. 이제 한국은 ‘네순 도르마’ 최강자 보유국이 됐다고 해도 될 듯하다. 류 역 소프라노 황수미의 섬세한 연기와 가창도 큰 울림을 주며 환호를 받았다.
사실 ‘투란도트’는 얼음공주가 키스 한 번에 사랑에 빠진다는 억지스런 결말 때문에 늘 재해석이 과제였다. 2023년 서울시오페라단은 투란도트가 자결하는 결말로 만들기도 했다. 이번 무대는 러브스토리가 아닌 전쟁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해석됐다. 정 연출은 “1차 대전의 참상을 목도한 푸치니가 전쟁에 대한 탄식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이라며 “상대를 위해 패함으로써 전쟁의 사슬을 끊는 결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의 은유라면, 엔딩 이전에 전쟁의 여신 투란도트와 사랑과 헌신의 화신 류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전쟁의 여신을 택하는 칼라프가 안타까워 보였다. 끝없이 전쟁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 죽음 직전의 푸치니에게 있었던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