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순 전 한남대 명예교수는 대학 시절, 고전 영미 소설을 읽으며 자유롭게 사는 삶을 꿈꿨다. 일러스트 챗GPT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똑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중략)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중에서
1954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강의실. 전북 전주의 시골 동네에서 올라온 스무 살 신입생 서초순에게 고전 영미 소설은 눈이 번쩍 뜨이는 신세계였다.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신분과 계급을 넘어 사랑 앞에서 당당했고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사랑은 부모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었고, 여성이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이기 전에 꿈과 열망으로 가득한 하나의 인격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제인 에어』는 서초순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가진 것 없는 고아였지만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제인. 그런 제인이 신분과 계급을 넘어 로체스터와 주고받는 뜨거운 사랑.
제인 에어의 당당함은 1950년대 한국의 젊은 엘리트 여성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여성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좋은 혼처를 찾아 시집 잘 가는 것이 최고의 복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제인 에어를 동경한 서초순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
" 결혼이요? 그런 걸 뭐 하러 해요? 한 집에 같이 살면 맨날 싸우기만 하는걸요. 좀 더 자유분방한 연애는 어때요? 옆집에서 따로 살면서 서로 보고 싶을 때만 왕래하는 연애요! "
서초순 전 한남대 명예교수가 지난 3월 경기 의정부시 자택 인근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강정현 기자
〈100세의 행복3〉 13화에선 시리즈 최초로 전 생애를 ‘싱글’로 살아온 90대 여성을 만났다. 자유로운 성정의 서초순은
‘한 남자의 여인’으로만 살아가기엔, 세상에서 할 일도 사랑할 것들도 너무 많았다. 여성을 옭아매던 사회적 편견들에서 훌훌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서 온전한 인격체로 살고자 했던 서초순(91) 전 한남대 영어교육과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3억 기부왕의 국밥에 ‘이것’이 필수
" 제 삶의 일부를 드린 셈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
대전 한남대에 2022년 2억1000만원, 올해 1억원, 총
3억1000만원을 기부한 서초순은 이렇게 말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게 그가 밝힌 기부의 이유였다.
학교는 그가 일했던 사범대학 건물의 세미나실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대단한 선행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특별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저 “모교와 다름없는 학교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이 컸다”며
“한남대에서 보낸 지난 21년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 나의 삶 그 자체였다”고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인물이기에 평생 모은 재산을 후학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 수 있을까.
서초순 전 명예교수가 한남대에 총 3억1000만원을 기부했다. 사진 한남대
영문학 교수, 화려한 싱글, 통 큰 기부자…. 취재진은 서초순을 만나기 전 그를 설명하는 이 세 가지 조합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이 될 거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와 마주한 장소는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오래된 국밥집이었다. 서초순의 자택 인근에 자리한 이 노포에서 그는 자신의 ‘소울 푸드’라며 6000원짜리 콩나물국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단골의 주문에 뜨듯한 콩나물국밥을 내온 식당 주인은 테이블 위에 ‘이것’을 올려놓으며 “이 손님이 항상 달라고 하니 미리 챙겨드린다”고 귀띔했다. 국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