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송호근의 세사필담] 보랏빛 구름 속에 증발한 사관학교

중앙일보

2026.08.03 08:22 2026.08.03 16:03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1951년 4월 21일, 임진강을 건너 서울로 남진하던 중공군과 북한군을 최전방에서 맞닥뜨린 것은 영국 글로스터 대대였다. 영국군 750명은 파주 감악산에 진을 쳤다. 달 밝은 밤, 호적소리가 났다. 납작한 덤불이 일어서더니 해골과 등뼈가 그려진 흰색 변복들이 다가왔다. 마지막 총알까지 발사했다. 교전 끝에 살아남은 영국군은 한강을 건너 우면산에 최후 진지를 구축했다. 영국 『더 타임즈』 서울특파원 앤드류 새먼이 참전 노병 수십 명을 인터뷰한 『마지막 한발』의 극적 장면이다.

수도권 방어가 전쟁의 숨통인데
전문성 없는 합동성은 오합지졸
궁핍한 촌락, 투자 없는 사관학교
인재들 헐값에 목숨 내놓지 않아

중공군의 진격 루트는 어디였을까?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니면 고양? 75년 전 일이지만, 수도방어 작전에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다. 한강다리가 몇 개인가? 생도들에게 물어보면 더러 챗GPT를 꺼내들 것이다. 답은 32개. 만약 북한군이 고양, 미아리, 구리 세 방향에서 밀려오면 어느 다리를 끊을까, 아니면 놔둘까? 또 챗GPT를 꺼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에서 수도권을 점령당하면 패전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여전히 철통 방어다. 그래서 묻는다. 육해공 사관생도들은 서울과 수도권 지형을 머릿속에 샅샅이 입력했는지, 어느 곳이 적의 숨통을 끊을지를. 육군은 물론 함정(해군)과 전투기(공군)에서도 수도권 지형을 GPS처럼 익혀야 서울-부산, 서울-광주로 이어지는 후방지역 안전이 보장된다. 그런데 삼군 사령부는 파주가 아니라 계룡산 기슭에 있다. 서울에서 활보하는 사관생도들을 본 기억도 까마득하다. 홍대와 성수동 카페거리에서 동년배 청년들과 자주 교류해야 시대감각을 익힌다. 국가안보를 책임진 미래의 군장교가 계룡산과 금강 유역에서 시세를 꿰뚫는 예리한 인식을 기를 수 있는가? 사관학교는 국토균형발전의 대상이 아니다.

보랏빛 구름이 감도는 자운대(紫雲臺). 명칭만으로도 몽상의 무대에 국군사관학교 통합 조감도가 펼쳐졌다. 변화무쌍한 구름의 속성이라면 ‘통합’은 무결점 논리, 서로 섞여 뭔가 나올듯하다. 그러나 ‘융합’에 바쁜 대학에서도 땅, 바다, 상공을 뒤섞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하지 않는다. 동식물을 관통하는 유전공학이라면 몰라도 흙, 물, 공기를 섞어 무엇을 만들까. 미사일, 드론, 정보 혼성팀이 활약한 미국-이란전도 각 분야 전문군의 합작이다.

2차 대전 이오지마 전투, 6·25 장진호 전투가 그랬다. 유황섬 함선 포격에 이은 공군의 진지 타격 끝에 해병대가 상륙을 시도했다. 장진호 혹한을 뚫고 철수하는 해병대를 공군이 엄호했고, 흥남부두에 대기 중이던 해군이 그들을 실어 날랐다. 전문성에 기초한 합동성이 효력을 발휘한 작전이었다. 21세기라고 합동성이 우선인가? 국방장관과 국회 국방위 위원들은 사관학교부터 합동성을 길러야 우주·사이버전에 대비한다는 논리로 통합입법을 예고했다. 국방장관은 병사 출신이다. 국내외 군사 전문가의 의견을 두루 청취하고 내린 결론인가, 아니면 현 정권의 폭주 습성의 결과인가? 필자가 일생을 보낸 대학에서도 전문성 없는 융합이 성공한 사례는 전무했다.

전문성이든 합동성이든 군사력 증강에 선결 요건이 있다. 사회학자로서, 그리고 3년 반 육사 교관으로 근무한 필자의 경험을 되살리면 ‘인재를 모으는 것’이 첫째다. 청년인재가 사관학교를 외면하면 군사력은 내리막길이다. 요즘처럼 장성과 고위 장교들이 추풍낙엽인 때 사관학교는 선택리스트에서 오래전 지워졌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사관생도들은 결혼시장에서 꽤나 인기였다. 인터넷 결혼 인기직종을 검색해보니 요즘 장교는 8등급에 분류돼 10등급인 중소기업 생산직보다 약간 위였다. 사회적 위상, 명예,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 한 군문이 북적일 리가 없다. 장성들이 무더기로 내란혐의에 쓸려가는 시대에 누가 장군을 꿈꾸는가. 군사력도 쓸려간다.

지난 40여년 명문 대학에는 예산과 기부금이 급증해 멋진 건물과 첨단 시설이 들어섰다. 카이스트는 기부금이 넘치고, 포스코는 ‘10년 1조 2천억 원’을 포스텍에 약정했다. 사관학교 캠퍼스는 궁핍한 촌락이다. 건물은 낡고 교수진은 자존감을 잃었다. 2026년 육사 교육예산은 284억 원, 해사 221억 원, 공사 210억 원(중앙일보 7월 23일자 22면). 그래도 ‘일인당 약 7천만 원’으로 대학 중 최고라 하는데 비싼 장비에 학생 수가 작을 뿐 캠퍼스는 구축 일색에 기부자도 드물다. 국가안보에 목숨 내놓은 열혈 청년들 대접이 이러한대 헐값에 합동성을 키운다고?

합동성을 증진하는 최적 방략은 뭘까? 첫째, 명문대 교양과정처럼 태릉 육사캠퍼스를 확장해 1, 2 학년 삼군 통합과정을 만들고, 3학년이 되면 태릉, 진해, 청주로 보내 전문교육에 주력하는 국방부 원안, 여기에 초급장교 시절 합동성 교육 트랙을 신설하는 방안이다. 둘째, 국가안보라는 최고의 가치에 준하는 예산을 배정하고, 우수 생도와 우수 교수진을 선발할 여건을 갖추는 것. 군은 독재정권의 대가를 치르는 지난 40년 동안 한없이 초라해졌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