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덴마크 공주가 3일(현지시간) 덴마크 슬라겔세의 군 부대로 입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몸집만 한 배낭 하나를 둘러멘 19세 공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병영 문을 들어섰다. 왕실 수행원도, 화려한 의전도 없었다. 드레스 대신 군복을 입은 그를 기다리는 건 11개월간 군사 훈련과 실제 작전 임무다. 덴마크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이사벨라 공주 얘기다.
유럽 전역에 안보 불안이 짙어가는 가운데, 왕실 여성의 군 복무가 잇따르고 있다. 러시아의 위협에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이끈 미국의 리더십마저 흔들리자 “유럽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독자 방위론이 힘을 얻는 모양새다.
로이터통신은 덴마크에서 이사벨라 공주를 비롯한 새 징집병 약 1600명이 3일(현지시간) 입대했다고 보도했다. 이사벨라 공주는 근위후사르 연대 소속으로 11개월간 무보수로 복무할 예정이다. 덴마크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군 의무 복무 기간을 기존 4개월에서 11개월로 늘렸다. 만 18세 이상 여성으로 징집 대상을 확대했다.
덴마크는 현재 5000명 수준인 연간 징집병 수를 2033년까지 75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이달 말에는 처음으로 징집병을 그린란드에 파견한다. 로이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 병합 의지를 거듭 밝히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배치”라고 평가했다.
네덜란드 막시마 왕비(오른쪽)가 지난 5월 네덜란드 브레다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 베레모를 고쳐 쓰고 있다. AFP=연합뉴스
네덜란드에서는 지난 2월 막시마 왕비(54)가 예비역 연령 상한(55세)을 1년 앞두고 육군 예비역으로 입대했다. 막시마 왕비는 권총 사격과 로프 등반, 행군 등 군사 훈련을 받았다. 왕실은 “우리의 안보를 더는 당연하게 여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입대 배경을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의 안보 우산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왕실까지 확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 교육을 받은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1위 레오노르 공주(21)는 지난달 3년간의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스페인 국방부는 “입헌군주국의 왕위 계승자는 군인 경력이 있어야 한다”며 “장차 군 최고통수권자가 될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르웨이 왕위 계승 서열 2위 알렉산드라 공주(22)도 지난해 4월 15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탱크 운전과 위생 훈련, 낙하산 강하 등을 소화하며 “인생의 버킷 리스트(희망 사항 목록)였다”고 밝혔다. 벨기에에서는 2020년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엘리자베스 공주(25)가 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화제가 됐다. 왕실은 “공주는 식사 배급과 청소도 다른 생도와 똑같이 했다”며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개인 방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특혜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20년 벨기에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 포복 훈련을 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공주. 로이터=연합뉴스
유럽 왕실에서 군복을 입는 여성이 늘어나는 건 단순한 전통 계승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국가를 지키는 의무에는 예외가 없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왕실의 솔선수범은 국가 정책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올해 3월 18년 만에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세르비아도 15년 만의 징병제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은 2011년 폐지한 징병제 부활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여성으로 병역 의무를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노르웨이는 2015년, 스웨덴은 2018년부터 남녀를 같은 징병 대상으로 묶는 ‘양성평등 징병제’를 시행해 왔다. 라트비아·핀란드·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도 여성 의무복무 도입을 검토 중이다.
한때 나토의 수혜를 누리며 군축과 모병제로 향했던 유럽이 왕실부터 일반 국민, 남성에서 여성에 이르기까지 국방 의무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모양새다. 로이터는 “러시아의 위협과 북극을 둘러싼 안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