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의 국제스파이박물관에는 관람객의 발길이 유독 오래 머무르는 전시실이 있다. 제목은 ‘운명을 가른 실패(Fateful Failures)’. 1941년 진주만 공습과 2001년 9·11 테러를 다룬 공간이다. 박물관이 내린 결론은 뜻밖이다. 두 비극은 정보가 없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사전에 적지 않은 첩보와 경고 신호를 확보하고 있었다. 실패는 정보 수집이 아니라 해석에 있었다. 흩어진 경고를 하나의 위협으로 읽어내고 대처하지 못했다. 운명을 가른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판단의 실패였다.
일본 지난달 국가정보국 출범
AI시대 국가 안보의 새 경쟁력
정보기관 개혁, 판단체계가 핵심
AI 시대에 이 교훈은 더욱 절실한 현실로 다가온다. 군사위성과 드론이 쏟아내는 방대한 데이터를 AI는 순식간에 분석하고 적의 이동과 행동까지 예측한다. 그러나 무엇을 국가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언제 행동할지,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 자체보다 이를 해석해 국가의 판단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일본은 지난달 31일 국가정보국과 국가정보회의를 출범시켰다. ‘일본판 CIA’로 불리지만 핵심은 해외 비밀공작이 아니다. 외무성·방위성·경찰청 등에 흩어진 정보를 통합 분석해 총리에게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판단을 제공하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출범 첫날 국가정보회의가 착수한 과제도 일본 최초의 ‘국가정보전략’ 수립이었다.
배경은 분명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와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더해 경제 안보와 사이버 공격, 첨단기술 패권 경쟁까지 국가가 동시에 대응해야 할 위협이 크게 늘었다. 정보는 폭증하는데 이를 종합해 국가 전략으로 연결하는 기존 시스템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일본이 바꾼 것은 정보를 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정보를 국가의 판단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이다. 부처별 칸막이에 갇힌 정보를 하나로 엮어 위협을 식별하고, 이를 전략적 결정으로 연결하는 국가 판단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다. AI 시대 정보기관의 경쟁력은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정보를 하나의 국가적 판단으로 엮어내는 능력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물론 조직 하나 만든다고 판단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조직보다 문화의 산물이다. 정보가 자유롭게 공유되고, 다양한 분석이 경쟁하며, 정책 결정권자가 불편한 현실까지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보는 국가의 힘이 된다. 판단력을 만드는 것은 조직의 간판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시스템과 문화다.
한국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일본이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며 국가정보국을 출범시키는 시점에 한국은 방첩사를 해체하고 기능을 분산하는 변화를 선택했다. 권한 분산이라는 개혁 명분은 확실하다. 그러나 개혁의 성패는 조직을 어떻게 나눴느냐보다 분산된 정보가 국가의 전략적 판단으로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안보 환경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더해 사이버 공격과 기술 유출, 해외 정보전까지 국가안보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조직은 나뉠 수 있어도 판단은 하나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정보기관 개혁을 권한 조정과 조직 개편의 관점에서 주로 논의했지만, 외교·안보·경제·산업기술에 흩어진 정보를 국가 차원의 판단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
앞으로 AI는 더 많은 정보를 더 빠르게 생산할 것이다. 이제 국가 간 경쟁의 본질은 정보의 규모가 아니라 판단의 질이다. 정보기관 개혁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조직의 이름이나 권한 배분보다 중요한 것은 흩어진 정보를 하나의 국가적 판단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일이다. 그래야 정보기관 개혁도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일본 국가정보국 출범이 던지는 메시지도 여기에 있다.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를 국가의 판단으로 바꾸는 힘이다.